<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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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말해봐 임마.잘 보여?미정이 봤니?』 상원이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물었다.
영석이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놀랐다는 표정을지었다. 간첩처럼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고 있던 승규가 조그맣게속삭였다.
『빨리 가봐.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거 아니냐.』 상원이와 내가눈길을 주고받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화장실이 있는 뒷마당으로 나가기 위해서 실내의 모퉁이를 도는데 문득 하영이가 눈에 들어왔다.하영이네는 우리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앉아 있었던거였다. 하영이와 눈길이 마주쳤는데 한 0.1초쯤 뿐이었다.하영이가 재빨리 날 외면해버렸기 때문이다.그 짧은 동안에,하영이는 싸늘한 눈빛으로 다 말했다.달수 넌 아주 한심한 애야.줏대도 없고 아주 타락했어.니가 나한테 보낸 편지같은건 옛날 에 잊어버렸지만,그냥 널 알고 있다는 것만 해두 난 너무 화가 나죽겠어. 나는 여자변소를 엿보려고 화장실에 가는 길인 게 속으로 조금 찔리긴 했지만,하영이의 태도에 전처럼 상처를 받거나 하지는 않았다.난 이미 그애를 잊기로 작정하고 있었으니까.난 오히려 하영이와 마주앉아 있는 놈이 석주인걸 보고는 하영 일 비웃어주었다.내가 아는한 석주란 놈은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재수없는 놈이니까(세상에서 가장 재수없는 놈은 마이클 잭슨이다).
1학년때 석주와 난 같은 반이었는데,한번은 담임이었던 도깨비가 종례시간에 모두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짝을 꼭 바꿔주면 좋겠다는 사람은 조용히 손을 들라고 했다.그랬더니 석주란 놈 혼자 진짜 조용히 손을 드는 거였다.나는 물론 눈을 가늘게 뜨고엿본 거였다.다음날 도깨비는 석주를 포함한 몇명에게 자리를 옮겨앉도록 지시했다.
하여간 나는 화장실이 있는 뒷마당으로 나갔다.
『니가 먼저 들어가.난 저쪽에 있을게.』 상원이가 「신사용」이라고 쓰인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내게 한쪽 눈을 찡긋 해보였다.나는 뒷마당의 한쪽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참 여러가지로심란하였다.화장실의 「숙녀용」칸에 계집애 하나가 들어갔다.내가이름을 모르는 애였다.우리 학년은 아닌 것 같았다.
여자애가 화장실을 나와서 건물 안으로 사라진 뒤에 상원이가「신사용」칸에서 나왔다.
『보이긴 보이는데…하여간 너도 봐봐.』 나는 피우던 꽁초를 상원이에게 넘겨주고 「신사용」칸으로 들어갔다.문을 닫아걸고 베니어판으로 된 벽면을 잘 살펴봤더니 바닥에서 한뼘쯤 위에 콩알크기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고개를 아래로 굽혀서 구멍에 눈을대고 옆방을 봤지만 아직 빈 방이었다.
5분쯤 기다리자 마침내 숙녀의 기척이 났다.신속하게 구멍에 눈을 맞추니까 치마를 걷어올리고 팬티를 끌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쪼그려 앉은걸 보니까 1반 계집애였다.그렇지만 조명 상태가영 엉망인데다가 각도도 좋지 못했다.구멍으로 보 이는 부분은 측면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하얀 엉덩이가 조금 보였고 쉬하는소리가 났고 휴지를 든 손이 잠깐 보였고 그리고 끝이었다.
나는 혹시나 계집애의 시선과 마주치면 어쩌나 해서 얼른 구멍에서 눈을 뗐다.가슴이 쿵쾅쿵쾅 뛰었고 아랫도리는 어느새 잔뜩부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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