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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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호 27면

1941년 초, 제2차 세계대전 전세를 관망하던 미국은 마침내 참전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당시 루스벨트 (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통해 앞으로의 세계는 인간이 살기에 보다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에서 루스벨트는 인간이 누려야 할 네 가지 기본 자유를 언급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기아로부터의 자유, 두려움(fear)으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이다. 특히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는 국제정치적 조건을 의미한다.

어떤 나라이건 주변국의 공세적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야 하며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 자유의 하나라는 것이다. 인류는 아직도 그 자유를 충분히 향유하지 못하고 있지만 미래지향의 가치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매우 귀중하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국제정치의 불안정을 해결하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책임이 국가들과 국제사회에 주어져 있다. 더 나아가 필요 이상의 과도한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뭔가가 있다면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두려움은 부정적 자극에 대한 감성적 반응이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위협이나 자극만이 두려움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때론 상상이 두려움을 자극한다. 두려움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경직되고 행동의 범위도 위축된다. 현상을 설명하거나 미래를 조망하면서 사용하는 언술 체계나 관념이 과도한 두려움을 만들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을 묘사할 때 “샌드위치”가 됐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최근 외국 언론의 한 줄 기사를 빌려 “담장 위에 서 있는” 한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샌드위치론은 주변국들이 나름의 성공적인 발전전략을 추구하고 있는 것에 반해 한국은 경쟁적 우위를 잃어가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는 발전을 위한 동인을 제공하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의 운명적 취약점과 두려움을 자극한다. 때론 무력감과 패배주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담장 위에 선 한국”은 국제정치에 편 가르기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한국이 기존의 대미·대일 관계를 소홀히 함으로써 자칫 외교적 고립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일깨운다. 미국·일본·호주가 한편이 되고 중국·러시아 등이 다른 편을 짜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담장 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샌드위치론과 담장론은 서로 다른 얘기처럼 들리지만 이 둘은 모두 약소국의 취약한 심리를 자극하고 상상적 두려움을 끝없이 재생산해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국제정치 현상을 오로지 구조의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낳은 인식이기도 하다.

21세기 국가 간 관계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다. 미·중 관계에는 협력과 견제가 늘 이중주(二重奏)처럼 존재한다. 중·일 관계도 마찬가지다. 국제사회 전반이 협력의 메커니즘을 강화해가는 추세다. 편가르기 상상은 냉전시대 인식이 관성으로 남은 탓인지도 모른다. 샌드위치론은 우리 스스로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자학적 관념의 산물처럼 들린다.

뒤집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샌드위치는 겉의 빵보다는 가운데 든 속이 백미다. 담장 위에 서서 세상을 보면 담장 밑에 웅크린 사람들보다 세상 구경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한국이 보다 능동적이고 유연하게 국제적 역할을 모색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면 필요 이상의 두려움으로 위축되기보다 긍정적 자화상을 만드는 일부터 필요하다. 인간은 현재(顯在)하는 위협을 해결하여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누려야 할 권리를 갖고 있다. 하물며 최악의 경우에 대한 상상과 편협한 인식, 불완전한 이론체계 때문에 두려움이 강요된다면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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