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평화없는 평화 협정은 공허

중앙일보

입력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연일 한반도 평화체제를 둘러싼 발언을 쏟고 있다. 그는 13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평화체제 논의는 단순히 종전(終戰)선언의 문제가 아니다. 까다롭게 모든 측면을 다뤄야 하며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는 12일에도 같은 취지의 발언을 내 놨다. '실질적인 평화체제가 구축되기 위해선 비핵화와 군비축소 등 험난한 선행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부 정용환 기자

미 정부를 대표하는 버시바우 대사의 행보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외교가 일각에선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범여권에서 대두하는 조급한 평화 무드를 겨냥한 것 아니냐"고 관측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는 평화협정”이라고 말했다. 평화체제에 신중한 입장인 버시바우 대사의 판단과 크게 차이나는 발언이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도 12일 평화체제 논쟁에 뛰어들었다. “갑자기 종전선언을 한다고 평화상태가 바로 오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송 장관의 발언은 노 대통령보다 버시바우 대사 쪽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공교롭게도 13일은 이스라엘ㆍ팔레스타인 평화협정 체결 14주년이 되는 날이다. 평화협정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하지만 뿌리 깊은 적대감과 군사적 신뢰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나온 평화협정은 그야말로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양측은 지금도 피비린내 나는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은 6ㆍ25전쟁의 당사자가 개입된 사안이다. 6·25전쟁은 한국군과 미군 중심의 유엔군이 북한·중국 군대와 맞서 싸운 국제전쟁이었다.

남북 정상이 만나 종전선언을 한다고 해서 금방 평화협정을 맺을 여건이 조성되는 것은 아니다. 50년 이상 전쟁 재발을 막아준 정전체제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남북이 군사적 상호신뢰를 쌓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평화 없는 평화협정은 공허할 뿐이다. 남북 정상회담에서는 한반도 평화의 출발점인 비핵화와 군비축소를 우선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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