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할리우드 영상에 남루한 일상 펼쳐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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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겉은 컴퓨터그래픽으로 포장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화려하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초라하고 나약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로 점철된다. 비루한 일상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듯한 연출은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현재 세계 공연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로베르 르빠주의 신작 ‘안데르센 프로젝트’ 이야기다.

 7∼9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최첨단 테크놀로지와 남루한 일상이라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요소를 절묘하게 섞어 놓았다. 스토리는 과거와 현재, 현실과 동화, 내적 심리와 외적 사건이라는 경계를 자유자재로 오간다. 퍼즐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모든 것은 현실이며 또한 상징이다. 그리곤 르빠주는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으로 관객에게 묻는다. ‘명작이란 과연 무엇인가? 공연을 한번도 보지 못한 어린아이도, 아방가르드(전위예술)에 빠진 전문가라도 다 만족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작품은 1인극이다. 배우 혼자서 2시간 15분을 쉬지 않고 진행한다. 등장 인물간의 극적 긴장을 눈 앞에서 볼 수 없고, 독백만으로 진행되기에 자칫 지루할 수 있다. 이를 르빠주는 3차원의 무대로 현혹시킨다. 공연은 나레이터가 허름한 모자를 뒤집어 쓴 거리 예술가로 돌변, 화면같은 무대에 그림 낙서를 하는 첫 장면부터 입체감을 선사하며 비틀림을 암시한다. 아름다운 평면 배경은 어느새 뭉툭한 나무줄기같은 소품으로 바뀌고, 출연 배우(이브 자끄)는 어느새 다른 인물로 변신하곤 한다. 진중한 연극이 아닌 마술이자 엔터테인먼트쇼 같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세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간 안데르센’을 그린다. 캐나다에서 파리로 건너온 작사가 프레드릭은 안데르센의 작가적 허영심과 외모 컴플렉스를 상징하고, 자위 행위와 포르노그래피에 탐닉하는 극장 매니저 아르노는 안데르센의 성적 불안감을, 모로코 이민자인 라시드는 안데르센의 사회적 신분을 비유한다.

 연결 고리는 절묘하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덴마크 코펜하겐 안데르센 박물관을 방문해 안데르센의 가방을 지켜보면 자연스럽게 무대가 18세기 안데르센 이야기로 넘어간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매개체 역시 가방이다. 가방을 들고 시속 300km가 넘는 속도로 달리는 기차를 타게 된 프레드릭이 느끼는 속도감은 마약을 먹게 된 프레드릭의 환각 상태로 이어진다. 모든 연결은 치밀하고 또 빈틈이 없다.

 극중 극으로 나오는 ‘드라이아드’는 안데르센이 말년에 썼던,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아련한 듯 슬픈 동화는 주류 사회에 편입하고자 하나 결국 변방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주변부 인물의 허망한 열망을 얘기한다. 이는 ‘안데르센 프로젝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공통점이자, 안데르센 자신의 독백이고, 이 작품의 연출가이며 작가인 르빠주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중첩된 함의와 은유, 그리고 치밀한 극적 구성력으로 뒤엉킨 무대를 향해 온전히 뜨거운 박수만 보내기엔 뭔가 억울하다. 아마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천재를 만난 좌절감과 질투심이 뒤섞이기 때문일 게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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