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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멋진 업그레이드의 한 해 되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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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면구스럽다.

설 연휴를 맞아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적조했던 친척.친지들을 만나 덕담을 나누는 게 세시를 맞는 우리의 오랜 미풍양속인데, 들리느니 온통 탄식과 한탄.불만뿐 새해의 포부와 설계는 온 데 간 데 없다. 모두가 손가락질이요, 삿대질이다. 여야, 어느 누구 가릴 것 없이 정치판 전체가 국민적 분노의 표적이 되고 있는 저간의 사정을 이번 설 귀경길에서처럼 뼈저리게 느껴본 적이 없다.

정치판에서 자퇴의 시점을 몇 달 앞둔 올 귀경길은 사실 정치인으로서보다 자연인으로서 고향 친지들과 어울려 보려는, 내 나름의 은퇴 예행연습이었다. 그래서 정치얘기보다 일상의 살림살이 얘기나 재미있는 우스갯소리나 나누며 옛정을 풀고 싶었는데, 대화가 조금만 진척되면 어느새 나라꼴에 대한 비분강개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4반세기 이상 정치일선에 몸담아온 사람으로서 고향땅에서 늘그막 막판에 볼기 장을 맞는 것 같은, 정말 면구스러운 심정이었다.

어쩌다가 우리 정계가 이처럼 얼굴 들기조차 부끄러운 난장판이 되어버렸는가. 소위 정치개혁의 소용돌이에 온 나라가 들썩이기 때문이다.

원래 개혁의 혁(革)자는 가죽, 가죽을 벗겨 새 신을 삼으려면 난도질과 무두질을 차례로 가해야 한다. 난도질만 해서 내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두질로 보듬고 다듬어 용도에 맞게 살려내는 일이 개혁의 관건이다. 지금의 개혁이 살리는 개혁이 아니라 죽이는 개혁, 나라를 결딴내고 우리 국민의 심성마저 황폐화시키는 마구잡이 난도질로 시종되지나 않을지, 고향 사람들의 거친 언사에서 두려운 심정 금할 수 없었다.

1970년대 마오쩌둥(毛澤東) 치하의 탈권을 위한 문화대혁명도 중국의 현대화를 수십년 후퇴시켰을 뿐이고, '깨끗한 손'이란 뜻의 이탈리아판 마니 폴리테도 한때 세계인의 경탄을 자아낼 만한 서릿발 같은 부패척결 작업이었지만, 기존 정당의 붕괴만 초래했을 뿐 오늘날 되돌아보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세평이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

등장할 때마다 사정과 개혁을 기치로 내걸지 않은 역대 정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당시 개혁의 주창자들이 정권이 바뀌고 나면 예외없이 또 다른 개혁과 청산의 대상이 되었을 뿐 역사단절의 악순환만 되풀이돼 왔다.

구호와 깃발이 요란한 개혁작업일수록 그것은 민생의 복리나 역사의 진정한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편 가르기, 내 사람.내 몫 챙기기의 사전 정지작업으로서의 인적 청산-이를 위한 일과성의 개혁, 캠페인성 개혁, 이런 동기가 수상쩍은 소위 개혁 드라이브는 북소리만 요란한 법이지 결과는 언제나 도로아미타불이나 부메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진정한 개혁의 비전, 낡은 패러다임을 바꾸고 병든 시스템을 개선해가는 구체적인 플랜과 프로그램에 대한 준비와 실천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말만 앞서는 구두선(口頭禪)이 아니라 소리 소문 없는, 때로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매일매일의 개선 개량이 일정하게 지속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을 탓하고 척결하기에 앞서 낡고 불편해진 구모델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진짜 개혁이다. 그리고 모델을 업그레이드하려면 앞서 나가는 모델의 장점부터, 그 원리와 작동방법부터 배워와야 한다. 우리와 여건이 비슷한 참조 가능한 살아있는 모델에서 조용히 배워와야 한다.

정말 우리나라만큼 문제가 많은 나라가 없다. 교통.환경.복지.교육 등 산적한 문제점을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는 데 우리의 지혜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갑신년, 1백20년 전의 조급하고 요란했던 갑신정변 사흘천하의 어리석음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21세기의 갑신년 개혁은 동시대인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멋진 업그레이드의 한 해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올해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여의도를 떠날 수 있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박관용 국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