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에서 만난 거인 비너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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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25면

언젠가 한번 들었던 이름일 뿐이고 어느새 잊혀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눈앞에 불쑥 나타나 결국 우리와 인연을 맺는 것들이 있다. 내겐 몰타(Malta)가 그랬다. 1년이라는, 내 인생의 믿을 수 없는 축복 같은 장기 휴가가 주어졌을 때 나는 아무런 연고도 인연도 없는 그 이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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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 몰타가 어디 있는데?”
친구들은 왠지 따지듯이 묻는 것 같았고 나는 괜히 변명하는 투가 되어 지중해에 떠 있는 섬이고,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사이 어디쯤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그래서?’라는 질문이 되돌아올 뿐이다. 그러면 나는 더욱 우물거린다. “그 나라 무지 작거든. 제주도의 6분의 1 정도밖에 안 돼. 그러니까 뭐랄까, 할 일도 별로 없고 갈 곳도 별로 없을 것 같단 말이지. 파란 대문 앞에 앉아 손을 모으고 수줍게 웃던 몰타의 어느 할아버지 사진을 본 일이 있는데, 그 느낌이, 그 문 안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손목시계를 차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솔직히 그것 말고는 몰타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고 그 이상의 기대 또한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운이 좋았지 싶다. 런던에서 몰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만난 노신사는 내게 몰타에 대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몰타는 말이오, 마치 거대한 박물관 같은 섬이라오. 고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섬이지.” 세상에, 그가 하는 말은 마치 거짓말처럼 찬란하게 들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우리 몰타인들은 공습을 피해 집집마다 땅속 깊이 대피소 같은 걸 팠단 말이야. 그런데 살기 위한 그 고된 작업이 고고학적 발굴작업 같은 즐겁고 놀라운 경험이 된 거야. 우리 가족이 뒤뜰을 파고 뭘 발견했는 줄 아오? 로마시대 귀족 부인의 묘실!”

거짓말이 아니다. 지금도 몰타는 땅을 파기만 해도 고대 유적이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어서 나라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특히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무려 1500년이나 앞선 거석 신전이 이 섬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데 40t이 넘는 그 엄청난 돌덩이를 그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옮겼을까 하는 문제는 현대의 고고학자들이 여전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취미 삼아 고고학이나 지질학을 연구할 수 있는 지중해 섬나라로의 여행이라니,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나는 몰타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진 고대 문명의 흔적을 탐사해 보리라 마음먹고 신전들을 찾아 나섰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물인 간티야(Ggantija) 거석 신전은 고조 섬에 있는 자그라라는 마을 변두리에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주 인상적인 여성 조각상과 마주쳤다. ‘몰타의 비너스’라 불리는 그 조각상의 여자는 가슴과 허벅지가 무척이나 컸는데 손으로는 자위행위에 몰입한 듯 음순을 만지고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거대한 신전을 만든 ‘거인’이 ‘여자’였을지도 모른다는.
호스텔에서 만난 다른 여행자들에게 나의 그 놀라운 추론에 대해 얘기했을 때 녀석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낄낄거렸다. 그들 대부분은 햇볕에 굶주린 영국인과 프랑스인들로 해변에서 몰타의 햇빛을 탐하는 일 말고는 야망이 없는 녀석들이었다. 하기야 몰타는 누구보다 태양 아래서 마냥 게으르고 나태할 수 있는 인간들을 환영하는 나라이므로 그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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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허니’ 김경씨는 패션 칼럼니스트이자 인터뷰어로 개성 넘치는 책『뷰티풀 몬스터』『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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