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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L문제 국방부에 맡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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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부가 발표한 남북 정상회담 합의서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공동번영, 조국 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는 데서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한 심상치 않은 구절이 있다. 그동안 정부·여권과 일부 학자가 ‘한반도 평화’는 북한과의 타협·양보로 가능하고, ‘민족 공동번영’은 무조건·무제한 지원을 뜻하고, 그리고 ‘조국 통일’은 민족끼리 연방제형 통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려를 넘어 현실화하고 있다. NLL(서해 불가침 해상경계선) 문제를 정상회담 의제로 삼으려는 시도가 단적인 예다.

한반도 평화구조에 대한 집권층의 인식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들은 북한의 노동당 규약과 김일성 헌법에 명시된 ‘한반도의 공산화’와 ‘주체사상화’ 그리고 이를 실천하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변함없는 강한 집착·의지를 애써 외면하고 “북한은 변하고 있고, 평화체제에 진입하고 있다”는 허구적 주장으로 왜곡한다. 정상회담 준비기획단장인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국회에서 “NLL은 영토 개념 아닌 안보 개념”이라고 하더니 “서해교전은 반성해 볼 과제”라는 망언까지 해 여론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이들은 NLL은 휴전협정에도 없는, 유엔군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남측 선박 진출 제한선’이지 북한과 합의한 군사적 경계선이 아니고, 남북기본합의서에도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고 돼 있으니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을 위해선 정상회담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을 왜곡한 북한 주장의 복사판이다. 휴전협정 시 지상에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상황에서 상호불가침선인 휴전선 설정에는 쌍방의 합의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해상에서는 제해권을 장악했던 유엔군이 1953년 8월 NLL을 설정하고 북측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 오늘의 NLL이 됐다. 패자인 북측은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전쟁의 속성이다. 여기에는 합의가 필요없었다.

이후 유엔군은 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과 전쟁을 예방하기 위 해 NLL을 남측 선박의 진출 한계선으로도 활용했다. 그리고 91년 12월 남한은 NLL이 휴전협정에 명시되지 않은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남북기본합의서에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고 명시해 분쟁 소지를 차단했다.

이를 인정한 북한의 입장은 곳곳에서 표출됐다. 북한 공식자료집인 『조선중앙년감』 59년판에는 NLL을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했다. 84년 9월 남한 대홍수로 북한이 수해물자를 지원할 때 NLL선상에서 남측에 인계하는 것에 동의하고, 93년 2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통상 국경선을 기초로 하는 남북 정보구역 설정 시 NLL을 기초로 하는 것을 받아들인 것도 NLL의 실효적 지배를 인정한 사례들이다. NLL은 피로 지킨 한국의 영토이며 이를 북한도 인정했다. NLL은 정상회담 의제가 아니며 남북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한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서나 논의해야 할 의제다.

김규 재향군인회 안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