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민기자의가정만세] “차라리 살림이나 할까” 말하지 마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30대 미혼여성인 H. 몇 년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요즘 작지만 짭짤한 사업을 꾸려가고 있다. H의 언니는 중형 병원의 의사로, 차기 원장 후보로 거론될 만큼 유능함을 인정받은 여성이다. 그런데 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쓰기만 하면 되는 전업주부 올케가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고 입이 아프게 얘기한다. “집에서 요리와 인테리어 등 여유로움을 마음껏 즐기는 올케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아실현을 하는 것 같아요.” 내년에도 사업이 올해처럼 잘 풀릴지, 승진이 바라던 대로 이뤄질지 등으로 밤마다 전전반측해야 하는, 이른바 ‘밥벌이의 고단함’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H와 대화하다 보니 최근 한 영화 마케팅 담당자와 나눈 얘기가 떠올랐다. 요즘 대학을 나온 여성 중 상당수가 직업을 갖기보다 결혼해 전업주부로 사는 것을 선호한단다. 근속연차가 거듭될수록 승진 문제에 신경 쓰이고, 말도 안 통하는 남자들과 죽기 살기로 경쟁해야 하는 조직생활이 더 이상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남의 손에 아이 맡기는 번거로움까지 이중고(二重苦)를 겪느니, 다소 치사할 때도 있지만 남편이 주는 돈 받아 쓰는 게 낫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이 부럽기까지 하다.

  나로서는, 반지빠른 요즘 애들이 선호하는 걸 보니 전업주부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나 보다, 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전업주부도 직업인데(연봉 2500만원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선택에 앞서, 부러워하기에 앞서 직업에 걸맞은 자격과 적성을 갖췄는지 따져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예컨대 H의 올케처럼 여름이면 오이와 토마토를 얹은 냉콩국수, 겨울이면 3년 묵은 김치와 돼지고기를 잘게 갈아 만든 만두 등 복잡한 이름의 음식을 척척 만들어 내놓을 수 있는지? 이번 달에는 레이스 커튼, 다음 달에는 로만셰이드, 이런 식으로 집안을 꾸미는 데 거부감이 없는지?

  간단한 밑반찬 만드는 것도 서툴러 대형 마트에서 주말마다 사다 먹거나, 늦가을에 깔아놓은 카펫을 열대야로 푹푹 찌는 한여름까지 깔아놨다면 당신은 자격미달이다. 1년 전 사서 넣어놓은 냉동만두와 생선 등이 우르르 떨어질까봐 냉동실 문을 열기 겁난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는 브리 밴 드 캠프라는 주부가 나온다. 브리는 요리 실력은 물론 인테리어, 정원 가꾸기, 뜨개질 등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완벽 주부다. 물론 도가 지나쳐 강박적으로 흐르긴 하지만, 브리는 ‘전업주부 수행능력시험 및 적성평가’가 있다면 아마 만점을 받았을 것 같다. 전업주부를 선망하는 당신, 이런 시험이 있다면 몇 점이나 받을 것 같으신지.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