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안맞는 통일장관 발언/박의준 통일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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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 핵문제로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남북관계는 새정부 출범후 대남 비난을 자제해 왔던 북한이 최근 김영삼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등 살얼음위를 걷는듯 불안하다.
정부가 북­미 3단계 고위급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남북대화의 「의미있는 진전」을 고집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정책의 사령탑인 이영덕 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의 「북한 인권 거론의 필요성」과 「원칙에 안맞는 대화불응」 발언은 그 내용이나 시의성,그리고 우리의 대북정책의 진지성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남북대화가 진전될만 하면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딴청을 부리고,하려던 일도 멍석 깔아 놓으면 하지 않는 북한도 문제지만 대화에 임하는 남한의 자세도 성숙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울고 싶은 아이 뺨때리는 격으로 북한에 빌미를 제공,남북대화를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 총리가 『…이제 북한에 아픈 말도 해야할 시점』이라면서 북한의 인권문제도 제기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정부가 북한과 대결외교를 펼칠 때는 별 문제될게 없다.
그러나 정부가 대화를 추구하고 있고 그 대화가능성이 미묘한 시점에 와있는 상황에서 불쑥 나온 이 발언은 북한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남북대화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삼는다. 이를 모를리 없는 이 부총리가 왜 새삼스럽게 북한 인권문제를 거론했는지 석연치 않다.
남북관계에 긁어 부스럼을 만든 사람은 비단 이 부총리뿐만 아니다.
권영해 전 국방장관은 남북한 특사교환을 위한 4차 실무접촉을 앞두고 핵개발 시설에 군사대응도 불사할 계획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북한의 강한 반발을 사며 결국 4차 접촉을 무산시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똑같은 맥락은 아닐지라도 안기부 훈령조작 사건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부는 심지어 지난해초 남북한 핵통제 공동위원장 회의를 제의해 놓고는 덜렁 팀스피리트훈련 실시를 발표해 버리기도 했다.
이같은 사례는 우리가 봐도 정부가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도대체 『북한과의 대화에 뜻이 있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할 정도니 대화파트너인 북한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민족의 장래가 걸린 남북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은 통일정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시의에 맞게 밝힐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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