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탐구>56.쌀개방반대 삭발.단식농성 민주 김영진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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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든 지난6일.제네바의UR협상장앞에서「쌀시장 개방반대」의 강력한 의사표시로 삭발.단식농성을 벌였던 民主黨 金泳鎭의원(전남강진-완도)은 귀국한뒤 17일까지 단식농성을 계속,아픈 農心을 대변했다 .
金의원은 趙淳昇(民主).曺馹鉉(國民)의원과 함께 제네바에서「끝까지 싸울 각오」였으나 아무런 준비없이 시작한 단식이어서 금세 탈진해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고 아쉬워하고있다.
金의원은 단식하면서 韓美간 쌀개방 사전합의 과정을 밝히라고 요구했다.그의 단식이 길어지자 지난14일 民主黨은 급기야 최고위원회의 결의로 단식농성 중지를 당명으로 내렸다.金의원은『쌀개방을 막지 못하고 그 결과 농민들이 안게될 피해에 대한 속죄의뜻』이라며 버티다 17일 농성을 끝내고 병원에 입원했다.
金의원의 농성이 계속되자 주위에서는 걱정과 함께 부담스럽다며언짢아하는 시선을 보내기도했다.일부 與黨의원들은『국제화.개방화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느냐』고 못마땅해했다.특히 농촌출신 의원들은『혼자만 농촌을 위하느냐』고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지역구민들로부터『당신은 뭐하느냐』는 항의를 거세게 받아 지역구에 내려갈 수도 없을 지경이라는 것.
金의원은『농민들의 고통에 동참하려는 의미일 뿐이고 누군가 한사람쯤은 그 일을 해야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金의원은 초선인 13대때부터 줄곧 농림수산위에서 활동해온 농업문제 전문가.특히 88년 국정감사에서 그의 활약상은 크게 돋보였다. 당시 金의원은 수입쇠고기가 대량으로 땅에 파묻힌 현장을 찾아내 폭로했다.83~85년기간중 쇠고기가 과 잉수입돼 소값이 폭락하는 파동이 일자 관계자들이 쇠고기를 그냥 땅에 묻었던 것.金의원은 소파동은 人災며 이로 인한 농민들의 엄청난 농가부채 역시 농정실패탓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6共정부는 농어가부채경감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2조2천억원에 이르는 자금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金의원은 고향에서 康津農高를 졸업한뒤 康津단위농협에서 말단직원으로 10여년간 근무,농촌현실을 몸으로 겪은 셈이다.
그러나 金의원은 80년 계엄당국에 의해「시국관 결여자」로 해직된다.농협직원이면서 70년대말의 농민운동,기독교계 청년운동등에 참여한 反 朴正熙정권활동이 新군부의 비위를 거스른 때문이다. 농협 해직뒤 신용조합운동에도 관여해 康津신협에서 7년간 근무하며 기독교계의 민주화활동을 도와왔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87년 大選을 앞두고 99명의 在野인사들과 함께 平民黨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金의원과 같이 그때 입당한 사람들이 李海瓚.朴錫武.鄭祥容.林采正 現 民主黨의원들이다.입당 이듬해인 88년 총선에 金의원 은 고향에서 공천을 받아내고 당선됐다.입당과 공천과정에서 그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湖南지역의 在野운동 代父인 洪南淳변호사다. 기독교계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洪변호사와 15년이상교분을 쌓아왔고 洪변호사로부터는「쓸만한 젊은이」라는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13,14대 총선에서 농림수산부장관을 지낸 金湜후보와 두번 싸웠다.
정치적인 시련은 바로 金 前장관과의 치열한 선거운동에서 빚어졌다. 지난해 14대총선에서 그는 金 前장관으로부터 허위사실유포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피소됐다.
합동연설회장에서 金후보측이 돈을 주고 입당원서를 받아 금권선거를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 문제가 됐다.
1심에서 2백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아 정치생명이 위태로워졌다.현행 선거법상 1백50만원이상의 벌금형이 확정되면 의원직 상실은 물론 향후 6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되는 것이다.
다행히 그는 지난 7월의 2심에서는 80만원의 벌금형으로 형량이 낮춰졌고 이로써 의원직 유지와 다음 15대 선거에도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법적으로는 有罪지만 정치적으로는「無罪」를 선고받았다는 주장이다. 金의원은 쌀시장개방에 따라 심화될 농촌문제에『할일이 너무도 많다』며 농가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데 노력할 뜻을 밝혔다. 〈朴泳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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