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허 장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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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금 항간에는 허신행 농림수산부장관을 두고 『불쌍하다』는 애기가 많다.
쌀협상의 현장인 브뤼셀·제네바에서는 천덕꾸러기로 이리저리 수모를 겪고,국내에서는 국내대로 「허신행」이니 「계유5적」이니 하는 험구를 당하고 있다.
허 장관은 에스피 미 농무장관으로부터는 『쌀이 그렇게 심각하면 왜 미리 대책을 못세우고 뒤늦게 당황하느냐』고 꾸지람(?)을 들었다는 것이고,우리측 개방조건에 대해서는 『너무 적고 너무 늦다』는 비아냥을 받았다는 소식이다. 그런가하면 양국 장관회담에는 우리측의 외무·재무·상공자원 차관보들이 농업관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또 캔터 미 무역대표와의 면담은 캔터측이 일방적으로 약속시간을 변경했고 미측은 허 장관이 왔는데도 영접하는 사람조차 없이 현관과 엘리베이터에서 우두커니 기다렸다는 얘기다.
이런 와중에 쌀시장 개방반대를 위해 제네바에 간 야당 의원들까지 허 장관을 보고 국내에서는 장관을 「허완용」이라고 한다고 했다니 허 장관이 화가 나게도 됐다.
그래도 협상한다고 정신없이 뛰는 사람을 지원은 못해줄 망정 그런 소리를 하다니 국회의원은 그만한 눈치도 없는지 모르겠다.
허 장관이 「계유5적」소리를 들었다면 더욱 사기가 떨어졌을 것이다. 전농이 구한말의 「을사5적」에 빗대어 김종필 민자당 대표·황인성총리·이경식부총리·한승주 외무장관과 함께 허장관을 「계유5적」이라고 지목했다는 것. 허 장관이 이처럼 나라 안팎에서 수모를 겪는 것은 자업자득일 수도 있다. 그가 주무장관으로 쌀시장 개방을 막지 못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개방불가를 외쳐놓고는 협상장에 가자마자 무너져 버렸으니 욕이 안나올 수 있을까.
그러나 그를 두고 『불쌍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쌀시장 개방이 어찌 허 장관 혼자 책임이겠느냐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정부 전체가 대들어도 될까 말까한 일인데 다른 요인들은 혹시 불똥이 튈까 몸사리기에 바쁘고 고위층들은 침묵 아니면 「개방불가」만 복창했으니 허 장관인들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불쌍한 것은 허 장관 자신은 물론 우리 정부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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