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변동 맞은 대학과 사회/김민석(시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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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념보다 「생활정치」를 하자/그럴듯한 명분보다 대안이 중요/변화 감당할 「양심적 힘」 등장해야
한국사회의 풍향계,대학사회가 일대 지각변동을 겪고 있다. 그것은 학생대중의 최고지도부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일차적으로 명징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마디로,선거판도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했던 과거의 대립구도를 미련없이 깨고 있다.
대학은 새로운 운동방식의 탄생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이제까지의 학생집단은 「저항정서」라는 하나의 축만으로도 쉽게 집단적 일체감을 형성하고 민주세력의 큰 보루가 되어왔다. 그것은 4·19로부터 6월항쟁에 이르는 학생운동의 자부심이었고,시대적 정당성을 공인받은 역사의 깃발이었다. 그러나 치열했던 민주­반민주 흑백논쟁의 긴장이 소멸하고 그대신 누구나 매일같이 맞닥뜨려야 하는 빡빡한 「생활의 공간」속으로 학생집단 대다수가 빨려들어가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정의감」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불안감」과 「대안 요구심리」가 광범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부터 투쟁의 과격성,현실적 대안의 부재,분열과 대립,독선적 태도,이념의 과잉과 생활감각의 결여 등으로 집약되는 학생운동의 자기 반성이 나왔다. 또한 현실을 정직하게 반영하려는 고민의 산물로 건강한 대학문화 창조,교육개혁,협소한 정치투쟁이 아닌 환경·평화·통일·각종 계층문제의 현실적 해결에 관심을 두는 다면적 사회참여 등으로 포괄되는 새로운 흐름이 생겨난 것이다. 즉 좌표 상실의 위기에 처한 학생대중의 진보적 열정이 그간 간과해온 「생활의 가치」 또는 「안정된 미래에 대한 욕구」에 새롭게 주목하면서 「생활속에서의 진보」와 「생활정치」로의 전환을 추구하게 된 것이 현재 대학사회에서 일고 있는 변화의 핵심인 것이다.
대학사회의 이러한 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이 속해 있는 젊은세대의 일반적 정서를 형성해갈 것이다. 나아가 젊은세대가 우리 국민 또는 유권자의 다수를 이루어갈 것이라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정치적 지각변동의 예고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숨어있는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오늘 신한국을 얘기하는 여당은 개혁을 논의하면서도 막상 개혁의 보루이자 이른바 신한국의 주체가 될 젊은 세대에게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가설 용기와 열정을 갖고 있지 않다.
야당은 청년층이 자신의 표밭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이들이 민주­반민주 구도하에서 야당에 표를 던져주던 의무감을 급속히 상실해가고 있는 현실에 지나치게 둔감한 상태다. 이런 현실은 거창하게는 7년 앞으로 다가온 21세기,짧게는 바로 다음의 총선과 대선에서 젊은세대의 선택과 행동양식,나아가 그들이 원하는 정치구도가 적어도 지금까지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오늘 대학가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변화의 근본적 배경이 되고 있는 21세기적 지각변동은 한편에서 「진보」의 위기를 초래하는 동시에 일본과 캐나다·대만에서 보듯 현실 적응력을 잃은 「보수」의 위기와 패배 또한 불러일으키고 있다. 보수건 진보건,여당이건 야당이건 낡은 관성을 벗고 구체성을 지닌 생활정치로의 정치과정의 합리화에 성공하지 못하면 붕괴의 위험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
이제 변신을 시작한 대학사회를 포함한 젊은세대,아니 변화를 기피하지 않는 「젊은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거대한 지각변동을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를 감당해갈 양심적인 힘」의 등장이다. 이들은 이제 이념의 좌우,여와 야,진보와 보수의 여부를 묻지 않는다. 역사적 전통만을 중심으로 세력을 나누고자 하지도 않는다. 대신 하나의 축으로 복잡한 사회를 무리하게 끌고 가려 하는 것은 아닌가,합리적인 토론과 민주적인 결정을 존중하는가를 묻는다. 주장에 걸맞은 전문적 운영능력을 갖추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어하며 명분의 근사함과 외견상 단호한 결의보다는 솔직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준비하고 있는가를 눈여겨본다.
이미 지나가버린 정치구도를 복원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결실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변화를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합리적 공통분모를 추구하는 새로운 정신」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미래를 여는 새로운 연대가 필요한 것이다.<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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