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 “태풍의 눈” 쌀개방/청와대­여야의 긴박한 움직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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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불가피” 인식속 공약 발목잡혀 고심/당정/“YS정부 궁지 몰 호기” 총공세 태세/민주
쌀시장 개방문제가 정국을 강타하고 있다. 청와대와 민자당은 그 불가피성을 시인하면서도 정치쟁점으로 부상하자 어쩔줄 몰라 허둥대고 있다.
개혁 파국에 밀려 존재의의가 희미했던 민주당은 김영삼정부를 구석으로 몰아붙일 수 있는 물실호기를 만난 양 쌀개방 반대의 칼날을 세우고 있다. 고감도 현안 「쌀정국」이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속단할 수 없다.
○…김영삼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앞세워 향후 정국을 장악할 것으로 기대했던 청와대는 쌀문제로 덜미를 잡히자 아주 낭패한 표정이다.
「북한핵」 문제해결의 돌파구가 열려 좀 안도하는 판에 「쌀 핵」이라는 고성능 핵폭탄이 터진 것이다.
더욱이 김 대통령이 대통령후보 유세중 『대통령직을 걸고 막겠다』는 결연한 공약을 한바 있어 입지가 더욱 옹색한 상태다.
미리부터 대응하지 못하고 쉬쉬해왔던 것이 감당키 어려울 정도의 사태로 확대돼가고 있다는 후회도 나오고 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때도 쌀 얘기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방미성과의 반감을 우려해 시치미뗐떤 것인데 『비프스테이크 대접받고 쌀시장을 열어줬다』는 비난이 몰아치자 청와대측은 허둥지둥 『지나가는 말로 쌀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며 확대 정상회담의 대화내용을 공개하는 등 파문확산 차단에 안간힘을 쏟았다.
청와대는 언론 등 여론지도층과 전문가들이 『쌀시장 개방은 어차피 불가피한 일인데 정부는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고 정부를 먼저 「비난」해주기를 기대했는데 이번 방미로 정부가 먼저 시장을 열어준 것으로 상황이 바뀐 것을 한탄하고 있다. 쌀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는 줄 뻔히 알면서 정부만 지켜보는 언론이 밉다는 것이다. 언론이 정부를 때려주면 정부가 마지못해 응하는 식으로 해 충격파를 최소화하겠다는 계산이 완전 빗나간 것이다.
어쨌든 청와대는 이렇게 된 이상 매를 맞아가며 국제적 압력을 불가피한 현실로 기정상실화해 쌀시장을 여는 수순을 밟아갈 것 같다.
○…민자당은 공식적으로는 『쌀만큼은 관세화뿐 아니라 최소시장 접근도 허용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지역과 경제관료 출신의원들 가운데는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이 임박했는데 아무 대책없이 고집만 피워서는 안된다』며 쌀시장 개방 불가피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않다.
이들은 『대외 의존도가 큰 우리경제를 계속 성장·발전시키려면 개방화·국제화에 부응하는 길밖에 없는만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나아가 『정치논리에 억눌린 나머지 쌀개방이란 말은 입밖에도 못내는 분위기는 타파돼야 한다』면서 『정부나 여당이 이제 국민들에게 우리가 처한 현실과 대책을 정정당당히 이야기하고 이해를 구하는 정공법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자당은 결국 대국민·정치권 설득을 위해 총대를 멜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는 관측이 많다.
○…민주당은 특별기구를 만들고 농민단체와 연대하는 등 총력을 다해 쌀개방을 막기로 했다. 특히 농촌출신이 많은 민주당은 쌀이 개방될 경우 다음 선거에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다는 생각들이어서 반대의 강도가 거세다. 쌀이 많이 나는 여주의 이규택의원은 『쌀이 개방되면 지역구를 옮기는 수 밖에 없다』며 배수의 진을 치고 투쟁할 각오를 밝혔다.
민주당은 26일 확대 간부회의에 이어 27일에는 의원총회를 열어 정부의 쌀개방대책을 성토했다. 의총은 일단 정부·여당이 개방을 약속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어 「경고」 수준의 결의안만 채택했다. 그러나 언제든 사실이 밝혀지는대로 정권을 건 투쟁으로 연결시킨다는 생각이다.
이기택대표는 『정부가 국민에게 솔직해야 한다』며 26일 대통령의 언급도 『석연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쌀은 국민의 생명줄이고,농촌은 우리의 최후 보루다. 쌀수입 개방만은 외국과 약속했더라도 취소해야 한다』며 『모든 수단을 강구해 저지하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계속 숨길 경우 『내년 정국이 파탄될 가능성이 있다』(조홍규의원)고 경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의 국회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서명운동과 투쟁을 벌인다는 방침이다.
김영진의원은 27일 의총에서 『상징적 항의의 뜻으로 단식 농성에 돌입하자』고 주장했다. 일부 의원은 김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걸고 쌀개방은 막겠다』고 했으니 대통령직을 내놔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조세형 최고위원은 정부·여당이 두가지 점에서 큰 실책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가지는 외교적인 능력부족으로 쌀에 대한 예외인정을 받아내지 못하고 이를 개방키로 한 것이며,또 한가지는 이를 숨김으로써 대비책을 마련치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흐름상 불가피하다면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김현일·김진국·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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