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병(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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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뚜렷한 원인과 병명을 모르는 내과적 질병을 예전엔 「화병」,또는 「속병」이라고 두루뭉수리로 불렀다. 전문적인 의술이 제대로 보급되기전 한방과 민간요법에 질병의 진료를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절의 얘기다. 「속을 태운다」거나 「화를 끓인다」는 일상적인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질병의 원인을 심한 걱정과 울화 때문에 심리적인 균형과 안정이 흔들리는데서 찾았던 것이다.
화는 원기를 망치는 원흉이다. 크게 성을 내면 간장에 화가 생기고,술에 만취하면 위장에 화가 생기며,너무 슬퍼하면 폐에 화가 생긴다. 사람의 주인은 마음이니 화를 내서 스스로 자기를 불사르면 타죽는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동의보감』 잡병편에 나오는 말이다. 화병은 그 해독이 막심해 병의 진행속도가 매우 빠르고 죽음 또한 별안간 닥친다고 했다.
예컨대 암같은 중병도 마음의 울화가 원인이라고 했다. 여자가 근심과 노여움으로 오랫동안 시달리면 유방에 멍울이 서고,이것이 5∼7년 지나면 궤양이 생긴다는 것이다. 「속이 상한다」 「속을 썩인다」는 말도 여기서 유래됐을 것이다.
최근 양방 의학계에서도 사람의 심리·정신상태가 육체적 질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나섰다. 질병의 이름에도 신경성 위장염이니 신경성 대장염이니 하는 용어가 등장했다. 또 「정신신체의학회」니 「심신의학회」니 하는 학술단체들도 생겨나고 있다. 진단대상을 신체에만 국한시키던 관점에서 탈피하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허준보다 4백년이나 늦은 발상이다.
요즈음 사정수사와 관련돼 수감중이거나 해외를 떠도는 「고위층」 인사들이 여러가지 질병을 앓고 있다고 전해진다. 아무개는 녹내장,아무개는 뇌출혈을 일으켰다고 하고 아무개는 협심증·전립선비대증·십이지장궤양·백내장·요통·기관지염 등 앓는 질병도 가지가지다.
갖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던 위치에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불명예와 수치의 나락으로 추락한 셈이니 그 충격과 낙담이 오죽하겠는가. 모뒤가 울화가 치밀고,속이 타고,속이 썩는데서 오는 「속병」이요 「화병」이다. 마음의 병은 마음으로 다스릴 수 밖에 없다. 사필귀정이라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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