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낯선 땅,낯선 사람(68) 뭐라구? 그냥해 본 소리였다구.명국이 어금니를 물며 고개를 돌렸다.제 아비가 속이 깊더니 이 녀석은 태복이 뺨치겠구나.
명국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늘 그렇듯이 돌을 쌓아올린 방파제 밑은 검푸른 빛을 띤 바닷물이 철썩이고 있었고 태평양을 향한 바다 저편은 물결만이 가없이 이어져서,섬 하나 보이지 않는 막막함 뿐이었다.둘은 방파제위를 천천히 걸어나갔다.붉게 물들었던 바다도 이 제는 잿빛으로가라앉아 가고 있었다.멀리 수평선 뒤쪽으로 부옇게 붉은 빛이 남아서 구름 사이로 물감처럼 번져 있었다.
어머니,어머니.그렇게 목을 놓아 울기도 했던 자리가 여기쯤이었던가.이 섬에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며,이제는 고향도 없고 부모도 없구나 기가 꺾여서 그렇게 울부짖기도 했던 나날들을 떠올리며 명국은 저물어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길남이 옆에 와 서며 말했다.
『들어가실래요? 몸도 성찮으신데….』 『저어쪽까지 걸어갔다가들어가자.오늘은 밤이 아주 푸근하구나.』 스적스적 걸으며 명국이 중얼거렸다.
『벌써 여름이구나.』 『여기서 살자면 세월가는 걸 모르겠는데요.보이는 게 바다밖에 없으니….』 『그래도 철되면 꽃 피고,잎 떨어지고 그런다.』 네 아버지는…그걸 못 견뎌했었다.내가 목욕장갔다 오는 길에 풀꽃이라도 꺾어가지고 오면,길길이 뛰면서화를 냈었지.육실할 놈아,왜놈 땅에 피는 건 꽃도 징그럽다.그러던게 네 아비였다.
누구에게 말하는 것도 아닌,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명국이 말했다. 『도망칠 생각은 말아.여기서는 못 나가니까.』 길남은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때를 기다려야지.젊은 기운에 어떨지 몰라도 세상은 그렇게 녹록한게 아냐.』 내가 무슨 눈치를 보인 것도 아닌데 이 아저씨는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가 싶어 길남은 명국의 조금 굽은 등어리를 내려다보았다.
게다를 지익지익 끌며 그때 앞쪽에서 여자 하나가 걸어왔다.일본옷,긴 유카타 차림이었다.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두사람 앞에서걸음을 멈추었다.
『또 보네요.』 『누구라구…옥선인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