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노출” 수표 푸대접(실명제 현장: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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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업소·상인 “세금 추적된다” 기피/현금요구로 은행들 곤욕/수표거래 많이하던 업소들 더 타격
『수표말고 현찰로 주세요』­.
17일 오후 모은행의 서울 서초동 지점. 예금통장에서 2천만원을 인출한 40대 남자가 부피가 적어 간편하고 현금보다 안전해 평소 거액인출에 많이 사용되던 자기앞수표 대신 현찰을 굳이 요구했다.
은행직원은 1만원권 1백장짜리 20묶음을 금고에서 꺼내왔고 남자는 준비해간 007가방에 돈다발을 가득 채워서 은행문을 나섰다.
금유실명제 실시이후 시민들 사이에 두드러진 것이 수표기피경향이다. 은행에서 수표를 입·출금할 경우 반드시 입·출금자의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번호를 기록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노출을 꺼리는 은행고객들이 수표대신 현금을 선호하게 되면서 생긴 것이다.
실명제가 처음 실시된 13일부터 각 은행의 수표발행액은 급격히 줄어든 대신 현금 인출액은 평균 두배가량 늘었다.
C은행 서울 명동지점의 경우 실명제 이전까지 하루평균 2천여장씩 발행되던 자기앞수표가 금융실명제 실시이후 절반수준인 1천여장으로 줄었으며 특히 1천만원이상의 고액권 수표는 거의 발행되지 않고 있다.
반면 J은행은 전국의 지점에 하루평균 30억∼40억원정도 필요하던 현금이 요즘에는 80억∼1백억원까지 필요해 현금부족이 심각하다.
영세상인이나 중소기업들도 수표사용에 따른 세금추적의 우려로 현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잦아 상대방을 당혹하게 하는 일이 허다해졌다. 예전에는 수표를 사용해도 세금추적의 걱정없이 신고소득에 대해서만 세금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 동대문·남대문시장 등 영세상인·소점포가 집중돼 있는 지역의 은행들은 현금수요가 급증해 현찰확보 비상이 걸릴 지경이다.
일반인들의 수표기피도 널리 퍼져 서울 사당동 M가구점의 경우 지금까지 50%에 달하던 수표사용고객이 최근에는 20∼30%수준에 머물고 있고,고객의 90%이상이 수표를 사용해온 시내 고급음식점에서는 요즘은 30%정도의 손님만이 수표를 이용하고 있다. S은행의 양모씨(51)는 『수표를 기피하는 경향과 동시에 은행의 전반적인 예수금도 크게 줄었다』며 『실명제 실시로 막연히 불안을 느껴 은행예금보다 자신의 금고안에 돈을 묻어두는 사람이 많은것 같다』고 말했다.<윤석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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