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시조집 『고요시법』낸 이상범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짙은 초록의 내음이 달아오르는 성하의 숲 속에 들어가 보세요. 햇살과 그늘이 교차하며 자연은 알 수 없는 은혜의 비단을 짜고 있지 않습니까. 그 숲 속의 고요를 호흡하며 일구는 바람이 되어 사물을 바라보고 삶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질서와도 같은 파문이 흔들고 지나가는 마음을 잡고픈 것이 제 시조들입니다.』
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당선으로 문단에 나온 중진시인 이상범씨(58)가 10번째 시조시집 『고요시법』(도서출판 토방)을 펴냈다. 올해로 시력30년을 맞는 이씨는 이 시조집에 들끓는 격정보다는 시조본연의 「걸르고 가라앉힌」평정심을 바탕으로 삶과 사물을 반추한 근작시조 80여편을 싣고있다.
『찐득한 서울 공간/스모그가 누워 있다/갈등의 지상엔 소나기/시대의 때도 훔쳐내고/한동이 등물의 매미소리/부채살에 감긴다/그날 그 할아버님/죽삼 위에 베잠방이/풀먹인 선비의 기운/꼿꼿하게 가누시고/더위도 앉은 채 물리시며/합죽선을 흔드셨다./…』「부채론」중).
이씨의 시들은 햇살과 그늘의 대위법 위에서 나온다. 전통 시로서 시조특유의 「고요한 시법」위에서 햇살과 그늘은 화합하며, 혹은 갈등을 일으키며 시공을 확산시킨다. 「찐득한 서울공간」에서 「그 할아버님 합죽선의 공간」으로, 「갈등의 시대」에서 「꼿꼿한 선비」의 시대로 시공을 아우르며 전통과 현대를 동시에 떠올려 사람으로서는 변함없을 삶의 본질을 물어보려는 것이 이씨의 시조다.
『서른 해 넘도록은 줄을 튕겨 보았었다/혼줄을 팽팽히 당겨 소리를 눌러서면/썰밀물 들고나듯이 들먹이던 하늘과 땅./산이 걸어오고 바다를 세워놓고/손바닥에 떼사슴이 먼지 일궈 달려가고/더러는 빌딩 숲 사이 종이배도 띄웠었다』(「조율」중).
30년 시력에 퉁기면 학들이 날아와 놀았다는 우륵의 가야금, 불면 바다도 잠재웠다는 만파식적 등 신기의 세계를 시조로서 꿈꾸고 있다. 그러나 만물 조응하는 신통한 시법의 세계는 여전치 아득할 뿐이어서 음만 고르고 있다.
『물론 자유시에 대한 매력에 끌릴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궁무진한 조화를 부릴 수 있는 시조 한가지만 가지고도 힘에 부치니 이 길로 정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시조시인들이 「한눈 팔며」자유시에 매달리고 있는 요즘 보기 드물게 시조의 외길을 걷고 있는 이씨의 말이다. <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