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아들역이 어울리는 탤런트 이정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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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탤런트 이정훈(31)은 연기경력 9년째로 접어들었지만 이름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84년 아주공대 졸업반 때 MBC공채 「17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이래 92년 SBS-TV 『두려움 없는 사랑』에 출연하기까지 그는 한번도 주요 배역을 맡아보지 못했다. 85년 단막극인 MBC-TV 『베스트극장-가객』에서 조연인 왕자역을 맡은 것이 가장 큰 배역이었을 정도다.
1m83㎝의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균형 잡힌 체격과 잘생긴 얼굴.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무명의 연기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데는 웃지 못할, 그러나 웃을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그는 자신이 오랜 무명시절을 보내야 했던 이유를『입사하기 전에 전혀 연기 경험도 없고 선천적인 끼가 약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큰 키 때문이다.
1m83㎝이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신장이지만 TV연기자에겐 오히려 핸디캡이 된다.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멜러물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 나라 드라마에서 주요 배역은 으레 상대역이 있게 마련인데 이정훈 같은 장신은 연출자들이 상대역 찾는데 골머리를 앓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정말 어떻게 키를 줄이는 방법이 없을까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연기생활 자체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어요.』
그러나 지난해부터 그에게도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SBS-TV 『두려움 없는 사랑』에 미스코리아 출신 서정민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면서 도시적인 세련된 분위기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곧이어 그는 MBC-TV 인기드라마 『아들과 딸』『여자의 방』에 채시라·고현정의 상대역으로 잇따라 출연하면서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몇년새 미스코리아 출신을 비롯, 키 큰 여자 탤런트들이 크게 늘어났어요. 연출자들이 제 상대역 찾는데 그전처럼 애를 먹지 않는 것 같더라구요.』
그는 최근 들어 자신이 자주 캐스팅 되는 이유를 여자탤런트들의 장신화 추세 때문인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캐스팅 한 제작진은 그가 지닌 분위기가 요즘 인기 있는 젊은 여성취향의 드라마에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최근 그가 맡은 배역은 모두 잘 교육받고 매너 있는 부잣집 아들역이었다.
그러나 9일 방송된 MBC-TV 베스트극장 『어느 흐린 날의 사랑』에서 그는 처음으로 주연을 맡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한여자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시골청년 연기를 통해 9년간의 무명시절을 보내며 쌓은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매사에 신중하고 절제하는 생활태도가 몸에 배 자유로운 상상을 억제하는 것이 연기자로서 최대의 흠』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그는 순발력보다는 지구력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남재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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