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感으로 즐기는 맛의 달인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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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28면

“시간에 쫓기긴 하지만 음식 먹는 것을 즐겨요. 오히려 얼마나 먹느냐로 해당 팀에 대한 평가를 미리 짐작할 수도 있죠.”
40년 경력의 베테랑 요리사이자 15년째 국제 요리 경연대회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앨런 파머(60)는 대회 내내 심사를 즐겼다. 그는 “씹고 뱉는 식의 요리대회 심사는 영화적인 과장”이라며 오히려 “음식에 살짝 입만 대는 경우라면 평가가 나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블랙박스 경연대회 심사현장

파머가 심사를 위해 내한한 이번 대회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블랙박스’ 타입의 경연대회다. 행사 첫날 요리에 쓰일 재료를 공개하고, 참가 팀들이 같은 재료로 하루 동안 4가지 코스의 요리를 만들어 겨루는 방식이다. 8년 전에 시작한 이번 대회의 우승자는 내년 두바이에서 열리는 세계 블랙박스 요리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다.
 
스포츠보다 엄격한 경쟁
올해는 특급호텔 9개 팀을 포함해 총 11개 팀이 참가했다. 조리사 3명과 팀장 1명이 한 팀을 이뤘다. 요리 재료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기에, 참가팀들은 온갖 종류의 예상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방법의 요리로 연습을 해왔다. 뚜껑이 열린 블랙박스엔 양고기와 쇠고기 부챗살, 두 종류의 와인과 치즈, 그리고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감자·아스파라거스·샐러리·표고버섯 같은 유기농 채소도 있었다. 각 팀 사이에 희비가 교차했다. 그것도 한 순간, 11개 팀은 바로 ‘실전’에 돌입했다.

올 대회의 심사위원은 세 명. 파머와 홍콩 디즈니랜드 총주방장 루돌프 뮐러, 홍콩 리갈 공항호텔 총주방장 한스 루디 뉘스바머다. 모두 세계적인 요리사이자 아시아 요리업계의 큰손들이다. 심사를 위해 한 나절을 굶은 이들은 모두 흰색 가운을 걸치고 한 손에는 평가 항목이 빽빽이 적힌 평가지를 들고 나타났다. 세계조리사협회(WACS)가 정한 경연 규칙을 반영한 평가지다. 전체적으로는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심사 비중으로 치면 약 70%. 재료를 얼마나 적절히 사용했느냐와 얼마나 독창적인 요리인가가 나머지다.

세 명의 심사위원들은 참가자들이 요리대회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켰는지부터 점검했다.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조리된 재료를 꺼내게 해 원래 제공한 것과 즉석에서 꼼꼼히 비교하기도 했다. 파머는 한 참가팀 앞에서 재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당신들을 믿을 수 없다”는 말까지 했다. 듣는 이에겐 모욕적인 언사이겠지만, 요리대회가 어떤 스포츠보다도 엄격한 경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언급이다.
 
오래 머문 팀이 좋은 점수
각 위원들의 심사 방법은 제각각. 파머가 메인 코스인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잘라 먹는 편이라면, 다른 두 위원은 육즙을 수저로 떠먹거나 향을 맡고 모양새를 보는 데 신경을 썼다. 그러다 보니 심사위원들의 재료나 맛에 대한 취향이 심사에 반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규칙 때문이 아니라 맛 때문에 어떤 팀 앞에 오래 머문다면 그 팀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팀 앞에서 심사위원들은 요리를 즐기는 표정이 역력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음식에 대해 묻기도 했다. 이번 대회에서 세 명의 심사위원들은 유독 두 팀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심사 결과도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박빙의 접전 끝에 불과 1점 차로 1위와 2위가 갈렸다. 우승팀은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팀. 이들은 양고기를 훈제해 갈아 만든 수플레와 와인과 채소를 함께 졸인 양고기, 그리고 파파야 셔벗을 전채로 선보였다. 주 요리는 살짝 구운 쇠고기 부챗살 스테이크였다. 쇠고기를 와인에 삶아 치즈와 버섯을 만 요리를 스테이크에 곁들인 것도 돋보였다. 바나나 아이스크림과 파인애플 라임 소스를 얹은 초콜릿 크림 치즈가 디저트로 나왔다.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가장 감탄한 것은 샐러리의 부드럽고 고소한 맛을 살린 크림 수프. 이 수프를 시식하며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좋아, 좋아(I love it, I love it)”를 연발했다(참고로 이 대회 우승 메뉴는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양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 가격은 13만원에 부가세 별도). 지난해 이 대회 우승팀이었던 코엑스인터컨티넨탈호텔이 2위로 밀렸고, 3위는 그랜드힐튼호텔 팀이 차지했다.

요리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음식을 시식한다는 것도 가끔 고역이지 않을까?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내저었다. 스스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심사위원이 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파머는 “오랫동안 굶은 후에도 2, 3시간에 걸쳐 천천히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진정한 미식가라야만 먹으면서 돈을 받는 요리대회의 심사위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인 요리사들이 재능이 있고 훈련이 잘 돼 있는 것 같다”면서 “세계 대회에서도 곧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고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2008 두바이 블랙박스 요리대회=2000년과 2002년, 2005년에 이어 네 번째로 열리는 ‘블랙박스’ 타입 요리 경연대회. 스포츠처럼 참가국 간의 대결로 인기를 끌고 있다. 세계 3대 요리 경연대회는 독일과 룩셈부르크, 그리고 싱가포르 대회다. 독일과 룩셈부르크 대회는 4년마다 열리지만, 싱가포르 대회는 2년에 한 번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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