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이 쓴 55년 달동네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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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달동네에서 살다 간 한 소시민의 삶의 흔적이 그가 남긴 수십 권의 일기장에서 되살아나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인천시 동구 송현동의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은 5월부터 특별 기획전인 '이광환(1926~2000) 일기전'을 열고 한 시민이 남긴 빛바랜 일기장을 전시하고 있다.

과거 수도국이 있어 수도국산으로 불리는 이 일대는 인천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지금은 재개발돼 아파트와 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광환씨는 송현동 38번지에서 태어나 78년 56번지로 이사한 뒤 2000년 세상을 뜰 때까지 평생 거주했다. 그는 일제시대 때인 45년 1월 경성전기에 입사해 70년대 말까지 인천지역 변전소의 전기공으로 일했다. 정년퇴직 후에는 동네에 구멍가게를 열고 통장 일을 보면서 노년을 보냈다. 3남2녀의 자녀도 이곳에서 컸다.

관람객들이 인천시 송현동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에서 열리는 '이광환(1926~2000) 일기전'을 보고 있다. [사진=인천=양영석 인턴기자]

이씨는 45년 9월부터 2000년 4월까지 '여원(女苑)일기' 같은 일기장에 국한문 혼용으로 시대를 기록했다.

가족들은 "워낙 꼼꼼하신 데다 기록을 남기는 것을 좋아해 일기 쓰기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가족들이 기탁한 70년까지의 일기장 27권이 전시됐다.

그의 일기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직접 목격한 장면이 나오고, 궁핍한 시대 달동네 서민들의 고달픈 삶과 애환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당시의 물가나 봉급 내역, 복용한 약 같은 시시콜콜한 것들도 기록돼 있어 사료로서 가치도 있다.

▶해방 정국=서울전기회사 인천지점에서 만 20세 미만자 13명이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요새 물가는 대단히 오르고 있다. 백미 한 되에 20원, 남자 고무신 한 켤레에 40원이 됐다. 동네에서는 변압기가 소실돼 캄캄한 생활을 한다(45년 12월 20일).

▶한국전쟁=인천공고 뒷산에 올라가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바다에 있는 제일 큰 군함에서 함포 사격이 시작됐다... 아직 집에 계신 어머님과 병이 위중한 큰 이모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고 눈물이 났다(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일).

▶궁핍의 시대=단수가 되어 물난리가 났다. 우물에는 물꾼들이 와글댄다. 싸움이 이따금 벌어진다. 밤 새워 물 긷는 두레박 소리가 이어졌다(55년 8월 25일). 춘계 회충 구제를 했다. 취침 시 6정을 먹고 기상한 즉시 5정을 먹은 뒤 3시간이 경과돼 조반 식사를 했는데 과량으로 그런지 황시증(黃視症)과 황뇨증(黃尿症)이 생겼다(57년 4월 21일).

수도국산 박물관은 지난 1년여 동안 일기장의 내용 분석을 거쳐 기획전을 마련했다. 서울과 인천에서 가족 단위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관람객의 방명록에는 '요즘처럼 물질이 넘치는 시대에 이런 일기장을 접하니 감격스럽다'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 같은 소감이 넘친다.

이 박물관의 김현지 학예사는 "예상외로 호응이 커 '이광환 일기'를 책으로 펴내는 방안을 가족들과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회는 10월 31일까지 계속된다(032-770-6131).

인천=정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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