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관순과 한방쓴 친구”/이화학당 기숙사동기 보각스님 회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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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관순이는 불같은 성격에 항상 의욕 넘쳐/3·1만세 전날 함께 밤새워 태극기 그려
유관순열사의 이화고 여기숙사 한방 친구가 생존해 있는 사실이 28일 밝혀졌다.
유 열사를 스스럼없이 「관순이」라 부르는 이정수스님(89·법명 보각). 보각스님은 유열사와 1914년부터 1919년 3·1운동때까지 이화학당 3층건물의 기숙사에서 한방을 쓰던 절친한 친구였다.
『3·1절만세 며칠전이었지. 저녁밥을 먹고나니 관순이가 무얼 한보따리 싸들고와 4층 강당으로 가자고 하더군. 그날밤 촛불을 켜놓고 강당 한구석에서 찬손을 불어가며 둘이서 태극기를 열심히 그렸지….』
유열사는 거사에 쓸 태극기를 손수 그렸다.
태극기의 정확한 규격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태극은 밥공기를 엎어놓고 그렸고 팔괘는 정확히 알 수 없어 대충 흉내만 낸 태극기였다.
『이렇게 만든 태극기를 오후 10시 취침종이 울린후 기숙사 36개 방문마다 붙였어. 다음날 발칵 소동이 났지.』
유열사가 한번은 보각스님의 빨간 치마를 빌려입으면서 치마끝단을 모조리 뜯어내 둘이 한바탕 싸운 적이 있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보각스님보다 반뼘이상 키가 컸던 유열사가 치마길이를 자신의 키에 맞추려고 단을 빼낸 것이 싸움의 발단이었다.
『관순이가 성질이 대단한 것을 그때 알았어요. 관순이는 싸움하던중 제풀에 화가 났던지 매를 한묶음 해오더니 「가난하고 박복한 년」하며 자신의 종아리를 마구 치더군요. 종아리에 피멍이 들때까지 말이에요.』
유열사는 불같은 성질에 항상 의욕넘치는 친구였다고 한다.
유열사와 보각스님은 3·1운동후 휴교령이 내려지자 귀향길에 오르게되고 이것이 둘사이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관순이와 대전행 열차를 탔는데 누군가 기차 소리가 어떻게 들리느냐고 묻더군. 어떤 애는 「한푼 두푼」하는데 관순이는 「독립운동 독립운동」이렇게 들린다는 거야.』
유열사와 헤어진지 6개월만에 유열사가 천안 아우내장터 시위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듬해인 20년 10월 시신으로 돌아온 그녀를 피눈물로 맞아야했다.
『그때는 살아있다는 것이 죄스럽더군요.』
보각스님은 이화학당 졸업후 상해로 건너가 한때 임시정부 관계자들의 음식수발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사망과 자살기도,일본군 장교로의 자원입대 등 굴곡의 삶을 살아온 그녀는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초대 조계종신도회장을 지낸후 현재는 서울 인근의 한 암자에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김창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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