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실명제 격돌|찬-강경식 재무 김재익 수석|반-신군부 출신 5공 핵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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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장사건의 충격은 컸다.
전두환 대통령은 두 차례의 개각이외에 민정당 당직개편(82년5월20일)을 통해 사태수습을 꾀했으나 민심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수천억단위 「돈의 대행진」에 한번 가위눌린 국민들의 정서가 이 정도 조치로는 달래지지 않았다.
「정의사회구현」이라는 정권의 구호는 일시에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뒤틀린 민심은 「땡전 뉴스」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으로, 대통령의 신상에 관한 블랙유머를 은밀히 주고 받는 풍토로 이어졌다. 『대통령이 시골에 가서 모내기에 열중하던 노인에게 「내가 누구요」라고 물었다. 그 노인은 흘끗 쳐다보더니 「이주일(코미디언)이요」라고 대답했다. 화가 난 대통령은 며칠 후 노인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여기가 어디요」라고 대통령이 묻자 노인이 이번에는 「초원의 집」(이주일씨가 출연하던 업소 이름)이요」라고 대답했다더라…』는 류의 농담들이 유행했다.
82년의 7·3조치로 촉발된 실명제파동은 이 같은 사회분위기를 잘 알고 있던 집권층의 위기의식이 배경에 깔려있었다. 강경식 당시 재무장관은 『이·장 사건 때문에 금융거래실명제를 적극 추진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해 7월3일 정부는 『1년 뒤인 83년7월1일부터 실명제를 실시한다』는 굵직한 계획을 발표했다.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으로 하고 금융소득에 대해 종합과세를 하겠다. 1인당 3천만원까지의 금융자산은 처음부터 출처를 문제삼지 않겠지만 3천만원을 넘는 실명 아닌 금융자산은5%의 과징금을 내야만 출처조사를 면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넉달간 뜨거운 공방>
이날부터 만4개월 동안 정부와 여당 내에서는 실명제 시행여부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강경식 재무장관과 김재익 경제수석은 전대통령의 재가까지 얻어놓은 7·3조치를 고수하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강 전 장관의 표현)』고 한다. 그러나 민정당의 권익현 사무총장과 행정부에서 앞장선 노태우 내무장관, 청와대의 허화평·허삼수 수석비서관 등 신 군부출신 거물급들을 중심으로 뭉쳐진 반대파의 목소리를 당할 도리가 없었다. 민정당 고위간부 출신의 한 인사는 『그 과정에서 전두환 대통령도 대여섯 차례나 태도가 바뀌었을 정도로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고 증언했다. 반대파의 주장을 듣고 생각을 고쳐먹었다가 다시 김재익 수석이 정연한 논리로 설득하면 당초안대로 강행키로 결심하곤 했다는 것이다.

<"돈 어디로 갈까"걱정>
실명제파동으로 온갖 논의가 오간 덕분에 제도실시의 당위성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큰 소득이었다. 그러나 다른 바탕도 없이 실명제만 하면 하루아침에 정의사회가 구현될 것처럼 신화화되거나, 반대로 실명제가 경제몰락과 동의어라도 되는양 부작용이 과장된 측면도 있었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회고다.
이·장 사건도 따지고 보면 사채자금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풍토가 배경으로 작용했다. 지하에 숨어 움직이면서 세금 한푼 물지 않는 이런 돈을 땅위로 끌어올리자는 취지에는 대놓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었다. 강 전 장관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비실명금융자산 중 95%는 3천만원이하 짜리였다. 문제는 나머지 5%였다. 지금도 수조원에서 수십조원까지 추정치가 엇갈리는 「지하경제」의 실질적 지배자인 「5%」가 금융실명제로 가장 피해를 볼 당사자였다. 이들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자금이 실명제로 인해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며 그러면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가 당연히 논란의 초점으로 등장했다. 그 논란의 배후에서「예상되는 피해당사자」들이 어떤 작용을 했는지는 아직 드러난 적이 없다. 다만 82년 당시에 좌절된 실명제는 본질과 상관없이 선거용 메뉴로 고정됐고, 그 때문에 87년 대선 당시에 공약으로 등장했다가 89, 90년에 걸쳐 한바탕 소동을 빚은 끝에 또 꺾이고 말았다. 92년 대선에서도 후보들은 너나없이 실명제 공약을 내세웠다. 이 때문에 『대통령 긴급조치로 확 시행하든가, 그게 너무 위험하다면 장기적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하든가의 두가지 방법뿐인데 우리 정치권은 어느 길로도 가지 못한채 자승자박만 일삼았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82년초 나웅배 재무장관이 내게 「실명제를 어떻게 시행해야 할지 연구해 오라. 절대 비밀이다」고 지시했습니다. 뒤에 알았지만 나 장관은 같은 재무부의 백원구 세제국장(당시)에게도 똑같은 지시를 했더군요. 나는 일시적인 시행은 부작용이 너무 크니까 실명·비실명 거래에 대해 세율차이를 두고 점차 그 간격을 벌리는 방식으로 단계를 밟는게 바람직하다는 검토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우연인지 몰라도 백 국장도 나와 같은 요지로 보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장 사건으로 나 장관이 물러나고 강경식 장관이 부임하면서 「급속한 추진」으로 방침이 바뀌었어요. 장관의 명으로 나는 금융실명거래법안을 만드는 실무팀의 반장이 되었고요.』
당시 재무부의 증권보험국장이던 안공혁씨(56·현 신용보증기금이사장)의 말이다. 당초 강 장관의 방안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안씨는 강 장관이 『그렇다면 문제점을 잘 아는 당신이 책임지고 추진하라』며 덜컥 실무반장에 앉히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안택수」라는 별명을 샀다. 박정희 대통령이 69년 3선 개헌 당시 개헌에 반대하던 JP계열의 김택수씨(작고)를 개헌사령탑인 공화당원내총무로 임명한 것에 빗댄 별명이었다.

<권익현 총장이 총대>
대통령의 지원을 업은 경제수석과 재무부의 기세에 눌려 한동안 관망하던 민정당이 반격을 시작한 것은 7·3조치가 터진지 열흘쯤 지나서였다. 전 대통령의 육사동기생인 권익현 사무총장이 대구지구당을 방문(7월15일)한 자리에서 『정부의 실명제 방안은 충분한 검토와 보완이 필요하다』고 운을 뗐다. 권 전 사무총장(현 민자당의원)의 증언.
『내가 「총대」를 멨지요. 나는 실명제를 하되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고 시종일관 주장했습니다. 대구발언 이후 은행·전산전문가·경제계인사들을 광범위하게 만나 여론을 들었습니다. 웃분께도 수시로 건의했고요. 그때부터 기나긴 엎치락 뒤치락이 시작된 셈인데, 그 과정에서 나는 찬반 자체를 떠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중성」에 대해 정말 실망했어요. 자기 소신보다 어느 쪽이 대세인가에만 신경 쓰는일 말입니다. 어떤 은행장은 내 앞에서는 실명제를 반대했다가 김재익·강경식씨 앞에서는 정반대로 태도를 바꾸었더군요. 한 컴퓨터전문가는 내게 「실명제도입에 필요한 전산망 정비작업에 적어도 5년은 소요된다」고 했다가 찬성하는 쪽에는 당장 내일이라도 가능할 것처럼 말하고, 심지어 같은 기관이 직성한 금융관련통계인데도 내가 받은 것과 김재익 수석이 받은 것이 서로 수치가 달랐던 적도 있습니다. 한심한 노릇이었지요.』
민정당의 당직자 대다수는 완강한 반대쪽이었다. 당 정책연구소에 있던 재정학교수출신 김종인 의원(53·전 청와대경제수석·현 민자당의원)은 급격한 실명제실시가 불러 올 부작용에 대해 체계적으로 반대논리를 펴는 브레인역할을 담당했다.
『7·3조치의 내용을 보니 공화당정권 때의 부가가치세 발상이 연상되더군요. 누가 지시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반대하고 나섰지요. 며칠 후 가족과 함께 동해안으로 여름휴가를 갔는데, 휴가도중 현지경찰이 나를 급히 찾아왔어요. 중앙당에서 빨리 올라 오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상경해 보니 진의종 정책위의장이 「내일 청와대에 가서 당의 입장을 보고해야 한다. 준비하라」고 해요. 서둘러 자료를 만들고 해서 다음날 진 의장과 함께 전 대통령 앞에서 조목조목 보고했습니다. 물론 대통령의 안색은 그리 좋은 쪽이 아니었습니다.』<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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