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식탁에 촛불을 켭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중앙일보는 4년 전부터 해마다 송년 식탁에 촛불을 켜자고 권해 오고 있습니다. 올해도 가족끼리 둘러앉아 서로의 가슴을 열고 희망과 사랑을 나누도록 촛불을 밝히길 제안합니다.[편집자]

올 한해, 우리는 많은 촛불을 켰습니다. 서울 광화문 거리의 촛불시위가 해를 넘겨 이어졌고, 부안에서도 촛불이 파도처럼 일렁였습니다. 탓하고 성토하느라 다들 목이 쉬었습니다.

촛불은 남극 기지에서 차디찬 주검으로 돌아온 젊은 과학도, 이라크에서 변을 당한 두 근로자 앞에도 밝혀졌습니다. 더 기막힌 촛불도 있었습니다. 경기도 이천의 한 중학생은 전기도 가스도 끊긴 집에서 죽은 어머니와 함께 지내며 촛불을 켜놓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몸서리쳤습니다.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마냥 어둡지만은 않았습니다. 바로 며칠 전에도 공중전화 부스에 "우리 동(洞)만이라도 결식 아동이 없었으면 한다"는 메모와 함께 현금 다발.돼지저금통을 놓아둔 선인(善人)이 있었지요. 제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우리 사회의 촛불은 그 분 말고도 적지 않았습니다.

2003년이 저무는 오늘, 한해 동안 밖으로 나돌던 촛불을 집안에 초대할 시간입니다. 오늘만큼은 남의 탓을 하지 맙시다. 정갈한 마음으로 저녁 식탁 위에 촛불을 켭시다. 온가족이 눈동자마다 사랑 듬뿍 담고, 한해의 어수선함도 거스러미도 말끔히 떨어냅시다. 촛불의 빛과 따사로움이 온집을 채우고 거리로 사회로 흘러넘치길 기원합시다. 초는 단 한개면 충분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