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크리스토퍼 힐(사진) 국무부 차관보는 6자회담의 ‘입’이다. 2005년 7월 4차 6자회담부터 수석대표를 맡은 이래다. 베이징의 숙소를 드나들면서 언론에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회담의 풍향계였다. 미 행정부 내에서는 ‘협상의 힐’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다.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을 끝낸 데이턴 평화협상 때 리처드 홀브룩 전 유엔대사와 더불어 활약하면서다. 2005년 북핵 폐기와 북ㆍ미 관계정상화 원칙 등이 든 9ㆍ19 공동성명, 북한의 핵 폐쇄가 포함된 2ㆍ13 합의는 협상가로서의 그의 주가를 한껏 높여주었다.
양국 외무장관 채널 생겨날 수도…중국 역할 축소 전망
하지만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묶인 북한 돈 반환이 3개월가량 지연되면서 그는 ‘양치기 소년’ 신세가 됐다. “조만간 해결될 것”이라는 그의 말은 빗나가기 일쑤였다. 행정부 내 강경파의 비판이 쏟아졌다. 2ㆍ13 합의의 모멘텀을 잃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왔다. 북한 비핵화의 ‘잃어버린 3개월’이 그에겐 ‘인고(忍苦)의 3개월’이었을 듯하다.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21일 방북한 뒤 22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한 그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북한과 우리는 2ㆍ13 합의를 완전히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했다. 북한이 2ㆍ13 합의상의 의무사항인 핵 폐쇄와 봉인을 확약했다는 얘기다. 그의 방북은 2ㆍ13 합의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북한이 힐 회견 하루 만에 그와의 협의 내용을 공개한 것도 주목거리다. 외무성 대변인은 “문제 토의는 포괄적이고 생산적이었다”며 6자회담과 6자 외무장관 회담 희망 일정까지 내놓았다. 이례적이다. 북한의 이 발표를 보면 향후 북핵 로드맵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 복귀→영변 핵시설 폐쇄ㆍ봉인→6자회담(7월 초)→6자 외무장관 회담(7월 말 또는 8월 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외무장관 회담은 6자회담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면서 북ㆍ미 외무장관 간 새 채널을 만들 전망이다. 북ㆍ미 관계 개선의 상징적 조치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힐 방북을 통한 북ㆍ미 양자회담은 6자회담 구도에도 적잖은 영향을 줄 것 같다. 실질적 협의는 북ㆍ미 양자회담에서 이뤄지고 6자회담은 이를 추인하는 형태가 될 수 있다. 6자회담 2ㆍ13합의도 마찬가지였다. 1월의 북ㆍ미 베를린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이 모태였다. 당연히 중국의 역할이 축소될 수 있다. 북ㆍ미 간 긴밀한 협의는 ‘납치문제’나 조총련에 강경자세를 보이는 일본을 더 곤란하게 만들지 모른다. 일본 일각에선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을 ‘닉슨 쇼크’(일본에 알리지 않고 72년 닉슨 대통령이 방중한 것)에 견주는 판이다. 북ㆍ미가 6자회담을 주도하는 국면이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