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프로도 특종이 필요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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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15면

일러스트 강일구

소싯적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기자로 살았던 나, 별로 출세도 못하고 이름도 날리지 못하고 그 생활을 접었지만 얻은 거 하나는 있다. 팩트(Fact)와 뉴스의 중요성이다. 세상과 대화를 나누는 ‘미디어’들은 그 종류와 규모에 관계없이 팩트, 즉 사실보도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팩트를 가장 빨리 전달하는 뉴스만이 대중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다는 거다. 그건 신문ㆍ잡지 혹은 블로그 같은 글로 된 미디어나 TV, 영화, 동영상 UCC 같은 그림으로 된 미디어나 마찬가지다. 주옥같은 달변으로 풀어낸 칼럼이나 분석기사 열 편보다 대중스타 인터뷰 하나, 혹은 스캔들이라도 뉴스 하나가 더 소중하다. 구체적 팩트를 담은 특종은 글과 그림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늘 지향해야 한다는 사실. 남들이 다루지 않던 새로운 사실과, 우리가 잊고 있던 가슴 아픈 현실, 그리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뉴스프로가 할 수 없는, 칼럼과 토크쇼와 다큐멘터리와 영화가 기록하는 특종이 아닌가.

이윤정의 TV 뒤집기

이번 주 ‘무릎팍도사-엄홍길’ 편과 지난 2주간 방영됐던 ‘무한도전-앙리’ 편은 오락프로가 만들어낸 특종이라 할 수 있다. ‘무릎팍도사’는 로체샤르 정상에 오른 산악인 엄홍길을 만나기 위해 현장에 달려가서 2000m 고지대에서 생생한 인터뷰를 따냈다. 덕분에 그의 등정기를 가장 빨리 담아낸 특종 영상을 내보낼 수 있었다. 그뿐인가. 점잖은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는 밝혀내기 민망한 암벽에서 대소변 보는 노하우, 정상에 오르는 엄홍길씨의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 같은 소소한 팩트까지 밝혀내, 오락프로만의 특종이 가능하다는 걸 일깨워줬다. 스캔들 연예인들의 변명이나 농담 따먹기의 장으로 변해 지지부진하던 이 프로가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도전하는 엄홍길씨의 감동적인 삶을 담자 시청자들의 가슴이 뻥하고 뚫렸다. 그건 탁 트인 히말라야 산맥의 기운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소식이 있는 팩트를 향해 한 발 빠르게 달려가 잡은 특종의 살아 움직이는 기운 때문이기도 하다.

‘무한도전’ 앙리 편 역시 어디서고 보지 못했던 프랑스 축구선수 앙리의 새로운 모습을 발굴해낸 ‘무한도전’만의 특종이다. 청소년 대회 때부터 지난해 독일 월드컵까지, 우리 대표팀과 맞설 때면 피하고 싶은 공포의 스트라이커로, 그리고 완벽한 몸매의 축구스타로서만 기억되는 그에게 그렇게 경쾌한 미소가 있다는 걸 신문 인터뷰와 방송 기자회견만 보면 어찌 알았겠나. 저질을 자처하는 소위 ‘평균 이하 남자’들의 몸짓에 온 얼굴을 가리며 웃어대는 ‘훈남’의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행복하게 만드는 특종 화면이었다.

기자 시절, 멋진 기사를 쓰기 위해 책상 앞에서 골머리를 앓는 내게 선배들은 늘 “무조건 밖으로 나가서 사람을 만나고 팩트를 찾아라. 그러면 좋은 기사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오락프로도 마찬가지 아닐까. 만날 뻔한 MC들과 뻔한 포맷으로는 아무리 머리를 써봐야 시청자에게 새로움은 안겨줄 수 없다. 기껏 밝혀내는 뉴스라고 해봐야 서로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정도뿐. 그러니 새로운 사실을 취재하고 세상 사람들이 관심있어 할 만한 새 소식을 담은 특종을 발굴해내는 정신, 오락프로에서도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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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
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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