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특파원이 본 유세현장/사사키 마코토 시사통신 서울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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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민의식 못미치는 후보 공약
민자당 김영삼대통령후보가 숙명의 라이벌 민주당 김대중후보의 아성인 광주공략에 나서던 날,김포공항에서 광주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평소 안면이 있는 한 한국기자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오늘 어떻게 될까요. 87년 때처럼 계란·돌멩이가 난무하지 않을까요』라고 묻자,그 기자는 『과거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으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조금 재미가 덜하겠는걸…』이라 농담하자 그는 『외국인의 눈으로는 그럴지 모르죠. 하지만 지역감정 해소는 한국인에 있어 정말 심각한 문제』라 되받았다.
그의 말을 듣고 좀 반성의 생각이 들긴 했지만,기자를 포함한 대부분 일본인의 머리속에는 한국의 대통령선거라면 으레 지역감정이 폭발,나중엔 유혈사태에까지 이르는 격렬한 유세장면이 떠오른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이 일본보다 빠른 한국인지라 이번엔 그같은 스테레오 타입의 선입관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선거가 진행되고 있다.
그날 김영삼후보의 광주유세는 과거와 달랐다. 시내 중심부의 한 공원내에서 열린 집회에는 1만명 가까운 시민들이 모여 김 후보를 맞았다. 집회는 달걀세례나 야유 한번 없이 질서있게 행해졌다.
이것은 김대중후보의 경우도 같았다. 전날 대구유세에선 약2만명의 청중이 몰려 김 후보의 연설을 경청했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의 지역대립 역사를 생각할때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기자는 국민당 정주영후보를 포함,주요 세후보의 연설집회를 여러차례 따라다녀 봤지만 어느 집회에나 눈에 띄는 것은 예상외로 차분한 분위기다. 과거처럼 연단 앞줄에는 당원과 일당 박수부대(?)가 지지구호를 외치며 후보자의 기를 흔들어댔지만,조금만 뒤로 돌아가 보면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청중들이 있다.
대구집회에 모인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만일 이번에 이곳에서 어떤 후보가 나왔더라도,이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표를 찍는 일은 없을 것이다. 후보의 능력과 인격을 음미하여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정 후보의 집회에서 만난 현대그룹의 한 회사원마저 『아직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지 못했다. 우선 들어보아야겠다』고 말했다.
또 가는곳마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경제가 그렇게 간단히 좋아질 리가 없다』는 얘기가 들리는 것은 정치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이제 사그라들고 있으며,「우선 들어보지 않고서는…」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 냉정한 정치의식이 유권자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청중수가 목표에 미치지 못하고 분위기가 조용한 것이 주최측엔 『열기가 없다』,『지지분위기가 확산되지 않고 있다』는 등 부정적인 징후로 비칠지 모른다. 그래서 주최측은 치어걸들의 무용이나 가요 쇼·녹음된 박수소리 등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있다. 하지만 그것이 유권자들의 의식에 부합되는지 정말로 의심스럽다.
한국 유권자의 정치의식은 날로 성숙돼가고 있는데 반해 정당쪽의 대응은 그에 따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각 후보의 공약도 대동소이해 쟁점을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최대 이슈가 바로 금권선거라고 하는 것은 어쩐지 허전하다는 생각이다. 후보들 모두 변화를 호소하고 있으나 구체적 공약엔 별 차이가 없다. 따라서 유권자에게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그것이 바로 변화』라는 메시지 밖에 전달되지 않는다. 결국 유권자는 후보의 정책보다 그 사람의 이미지로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각 진영 모두 어떻게 하면 유권자에게 더 좋은 인상을 심어줄까 하는 「이미지 선거」로 시종하고 있다. 김대중후보는 신문·TV광고에서 수줍어 하는 표정으로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고 말하면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한편 외국인 기자의 눈으로 보면 주요 세후보가 외교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는 것은 뭔가 빠진듯한 느낌이다. 관훈클럽이 주최한 세후보에 대한 특별회견에서도 외교분야에 대해선 거의 질문이 없었다.
노태우대통령이 유엔가입,중국과 국교수립 등 외교성과를 거두면서도 지지도가 낮았던 것처럼 한국에선 외교성과가 선거에서 표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의 차기정권 5년은 국제사회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 시기임에 틀림없다.
탈냉전의 파도가 밀어닥쳐 구조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은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 여러나라들과 어떠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것인가. 종군위안부 문제,무역역조문제 등을 포함한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 나갈 것인가.
이웃 국가의 기자로서 전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만,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선거는 상당히 「내향적」으로 치러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일본엔 대통령이 없어 대통령선거가 없다. 만일 있다해도 대통령이 될만한 그릇의 대정치가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의원내각제는 그 제도에 맞는 「작은 정치가」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는 비록 훼예포폄은 있어도 커리어·능력·개성이 뛰어난 인재들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한국에 내각제가 도입되면 마지막 대통령선거가 될 이번 한국의 대통령선거를 흐림 없는 눈으로 똑바로 지켜보고 이를 일본인들에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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