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증제시 아쉬운 선거부정 고발/이상일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국운이 걸린 공명선거」 캠페인을 벌여온 중앙일보가 20일 대통령선거 공고에 때맞춰 선거부정 고발 접수창구를 개설하자 시민들의 부정고발 제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서울 목동 14단지에 산다는 한 시민은 모당에서 관광시켜준뒤 의무적으로 입당원서 3부씩을 떠맡겼다고 고발했다. 성남시의 한 상점주인이라고만 밝힌 시민은 『어떤 당에서 제주관광 1박2일에 참여하라』고 권유하고 『당원 10명을 끌어모아주면 2만원을 주겠다고 제의했다』고 알려왔다.
특정 정당과 관련있는 한 계열사 직원은 현재 그 정당이 유관회사 직원들을 차출해 「기동대」를 만들고 당의 행사에 동원하는 바람에 업무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고 하소연해왔다. 그는 구체적으로 수도권을 포함하는 대전 이북지역을 담당하는 3백여명 규모의 기동대가 있으며 대전아래 지역은 8백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기동대가 한 거점을 중심으로 활동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들 기동대원이 시민 10명 정도의 모임을 주선하면 회사에서 수고비조로 2만원 가량이 지급된다고 덧붙였다.
또다른 정당은 선거법상 허용되지 않는 컴퓨터 서신을 통해 그 당 후보를 선전하고 지지를 호소했다고 한 서울 강남주민은 알려왔다. 양평의 한 농민은 또다른 당이 단합대회 명목으로 청년들을 모아 향응을 베풀었으며 모당은 친척을 동원해 「매표성 제의」를 해왔다고 혀를 찼다.
이런 제보를 해온 시민중 적지않은 수가 한사코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했다. 부정을 제의하고 권유하는 측이 주로 친척이거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또는 자신들의 업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제보자들의 개인적 고충을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나 본인들이 직접 물증을 제시하는 등 시민정신의 발휘가 아쉬운 대목이다. 부정을 저지르거나 모의한 쪽에서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거나 근거를 대지 않으면 응당 부인부터 하기 때문에 제보 그 자체만으로는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는다.
선거풍토의 혁명을 위해 사상 초유의 중립내각까지 구성된 마당임을 국민 모두가 인식하고 좀더 민주시민으로서의 용기와 의무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이번에 개정된 대선법은 과거의 쌍벌죄 규정을 바꿔 금전·물품·기타이익 등을 받거나 받기로 약속했어도 스스로 이를 밝히면 형벌을 면죄받도록 특례조항을 신설해놓고 있다. 이는 불법·타락에 대한 시민의 고발을 활성화해 기어코 공명선거를 정착해야 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마르고 살찌기는 석수에 달렸다』는 속담처럼 이제 공명선거는 전적으로 시민의 의지와 의식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