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점 한세트에 1,500만원이나…|판화값 너무 비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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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미술시장의 오랜 불황을 타고 비교적 값이 싼 판화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김환기·장욱진씨 등 작고 작가의 작품을 판화로 제작한 복제품이 비싼 가격으로 시판돼 물의를 빚고 있다.
환기 미술관은 개관 기념으로 74년에 타계한 고 김환기 씨가 생전에 그린 과슈하를 최근에 석판화로 제작, 12점 한 세트에 1천5백만원이라는 비싼 값에 팔고 있다. 또 미국「한정판출판클럽」이 고 장욱진 씨의 유화를 토대로 제작한 석판화도 정송 갤러리가 11점 한세트에 2천만원으로 판매중이다.
특히 1백 카피를 찍은 김환기 씨의 판화는 작가의 사인도 없이 환기 미술관과 프랑스 뮈로(Mourlot)공방의 철인만 찍힌 채 거래돼 미술 애호가들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불러 일으키고있다.
판화는 말뜻 그대로 판으로 찍어낸 복수미술품이다. 이 때문에 가격이 싸 많은 미술애호가들이 대가들의 작품을 나눠 갖거나 두루 감상하는 등 미술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해 왔다.
그러나 대량생산이 가능한 특수성 때문에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규제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도 판화의 큰 특징이다.
작가의 자필서명과 몇 장을 찍은 가운데 몇 번째 작품인가를 밝히는 넘버링을 반드시 연필로 기록하게 하거나 제작방법 등을 명시한 보증서를 첨부케 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가 직접 원판을 만들어 자신의 사인을 기입한 작품만이 오리지널 판화로 분류되고, 그 이외의 방법으로 제작된 것은 일단 복제판화로 봐야 한다는 게 판화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다.
복제판화는 다시 두 종류로 대별된다. 하나는 작가가 이미 한정판으로 찍어낸 원판을 소유한 유가족이나 화랑에서 작가사후에 원판을 기초로 다시 제작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유화 등을 판화로 바꿔 제작한 경우다.
6년만에 독일에서 귀국한 화가 이희중 씨는『원판을 다시 찍는 복제품의 가격은 오리지널 판화의 10분의1, 유화 등을 판화로 제작한 복제품은 20분의1 이하 가격으로 유통되는 게 서구 미술시장의 관행』이라고 설명한다.
서울판화공방 대표 황룡전 씨는『작가의 사인도 없는 명백한 복제품을 오리지널 판화에 가까운 가격으로 파는 것은 미술발전에 기여해야 할 미술관이 국내 미술시장의 유통구조를 오히려 교란시키는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환기미술관 오광수 관장은『복제품이라고 하지만 환기 미술관이 개관을 기념하여 1백카피 한정판으로 찍었고, 본인의 사인이 없는 대신 환기미술관의 보증철인이 있어 일
반 복제품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한편 장욱진씨 판화의 국내전시·판매를 맡고 있는 정송 갤러리 대표 김성렬 씨는『판화
작업은 장 화백 생전에 완료됐으나 프린팅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타계해 미망인 이순경 씨가 대신 사인을 했으며 50카피밖에 찍지 않아 미국에서는 국내보다 더 비싸게 팔리고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 현대 판화가 협회 김태호 회장(홍익대 회화과 교수)은『세계적인 대가가 직접원판을 만든 작품이라도 작가의 사인이 없으면 고급인쇄물로 규정돼 그에 준하는 가격으로 유통된다』고 못박고,『특히 김환기 씨의 석판화는 환기미술관이 운영자금 마련이란 좋은 뜻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국내 판화계에 피해를 줌으로써 고인의 명예를 실추시킨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최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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