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人 정치IN] 이재오와 약수터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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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이재오 최고위원은 밑바닥 표심을 움직이는 재주가 탁월하다. 그의 무기는 발이다. 한 번 가서 안 되면 두 번 가고, 두 번 가도 안 되면 될 때까지 간다. 그는 양복 차림에도 검은 운동화를 신는다. 많이 걷고 빨리 뛰기 위해서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지역구에선 승용차 대신 자전거를 주로 탄다.

11년 전 일이다. 14대 총선에 민중당 소속으로 출마해 떨어졌던 그는 신한국당 명함으로 15대 총선에 나섰다. 매일 새벽 5시면 집을 나서 온 동네를 누볐다. 무일푼의 운동권 출신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하루는 깜깜한 새벽에 인근 야산의 약수터를 찾았다. 혼자 산을 오르는데 저 멀리 귀신인지 사람인지 그를 노려보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무서움을 없애려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재옵니다.” 대답이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떨리는 목소리로 좀 더 크게 외쳤다. 메아리만 돌아왔다. 당장 줄행랑을 놓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이라면 유권자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덜덜 떨며 한 걸음씩 다가갔다. 사람 모양의 바위 하나가 떡 하니 서 있었다. 돌에 대고 선거운동을 한 셈이다.

그는 이 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됐다. 나중에 그는 “(당선되려면) 지역의 돌 하나, 쓰레기 하나에도 애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은 공중전만으로 이기긴 힘들다. 지상군이 투입돼야 승패가 갈린다. 선거도 그렇다. 아무리 후보가 뛰어나고 정책이 좋아도 조직ㆍ세력을 못 만들면 진다. 조직ㆍ세력을 만드는 데는 일대일 접촉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명박 캠프의 좌장 격인 그는 지난해 7월 전당대회 이후 한나라당 의원들을 하나 둘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지금껏 다녀간 의원이 80여 명에 이른다. 그의 집은 스무 평 남짓한 작은 단독주택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를 만난 의원 중 상당수는 이명박 캠프에 참여했다. 상대적으로 당내 기반이 취약했던 이 후보가 탄탄한 세를 구축한 데는 그의 공이 컸다.

그래서였을까. 당내 일각에선 그가 동료 의원의 배지를 쓰다듬으며 “한 번 더 해야지”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본인은 펄쩍 뛴다. “그런 말이 나올 때면 정치 집어치워야겠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한나라당 경선이 끝날 때까지 ‘이재오의 발’은 계속 주목의 대상이 될 것 같다.

김선하 기자 [odinele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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