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붙인 독일의 반극우파 집회/유재식 베를린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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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일 오후 베를린 중심부인 구동베를린의 루스트가르텐(쾌락의 정원).
한달에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며칠안되는 베를린의 11월 날씨답지 않게 모처럼 화창한 이날 30만명의 대규모 인파로 루스트가르텐은 물론 인근 운터 덴 린덴가도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극우파의 외국인에 대한 폭력에 항의하기 위해 「침묵하는 다수」의 독일인들이 나선 것이다.
이날 시위가 민간주도로 이뤄지긴 했지만 바이츠제커대통령과 콜총리를 비롯한 여야의 정치지도자들과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참가한데다 언론 등에서 10여일전부터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관,혹은 언론주도시위의 성격이 짙었다.
최근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행되는 극우파들의 외국인에 대한 폭력은 독일정부와 국민이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애써 쌓아올린 자유민주 국가로서의 명성을 뿌리째 흔들고 있어 독일정부로서도 대응책의 필요성을 절갑하고 있는 터였다.
독일의 국가 이미지가 흐려지는 것은 물론 이대로 가다간 국제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어서 독일정부나 뜻있는 독일인들은 외국인에 대한 테러는 일부 몰지각한 극우파들의 소행일 뿐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외국인에 대해 여전히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내외에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루드비히라고 이름을 밝힌 한 시민은 『지난 여름 이탈리아로 휴가갔다가 독일인이란 사실때문에 식당에서 쫓겨날 뻔했다』며 「어글리 저먼」(추악한 독일인)의 이미지를 씻기 위해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가했다고 밝혔다.
국제적으로 관심이 집중됐던 이날 시위는 그러나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사단이 일어난 것은 이날 오후 3시. 이날 시위의 유일한 연사였던 바이츠제커대통령이 연단에 올라서자 돌과 계란이 날아들었다. 시위에 반대하는 일부 과격분자들이 난동을 부린 것이다. 이들은 이어 호루라기와 휘파람을 불어댔고 일부는 마이크선을 끊어 연설을 방해하기도 했다.
「독일의 양심」으로 불리며 독일인은 물론 외국인들로부터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 바이츠제커대통령의 권위가 독일의 국가이미지와 함께 여지없이 실추되는 순간이었다.
성깔있는 콜총리가 언성을 높여 욕하고 나섰지만 시위가 엉망이 되고난 뒤였다. 독일 정부는 이제 자유민주국 독일의 체제유지 차원에서 극우파 문제에 적극 대처해 대외이미지를 새롭게 하는 것이 시급하고도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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