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우포늪에 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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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포늪에 갔다' - 김수영(1967~ )

내가 밟고 서 있는 이 진흙 속에는

가시연꽃, 그 씨앗들도 있으리라

썩지 않은 채, 그러나

화석이 되지도 않은 채

죽음 같은 기다림으로 일천년도 더

숨을 죽이고 있는 씨앗들

뿌리의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꽃은 핀다

한없이 고요한 저 꽃봉오리들

꽃잎이 열리는 순간,

그 찰나에 이루어지는 것은?



꽃잎 열리는 찰나,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다만 꽃이다. 썩지도 화석이 되지도 않은 채 시간이 그 몸에 살고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시간을 섬기는 '행위'가 있었을 뿐. 일컬어 기다림이라, 사랑이라 해도 좋다. 내가 밟고 있는 진흙 한 줌 속에 '말씀'보다 곡진한 '행위'가 있어, 우포늪 오늘도 우글우글 생명으로 들끓는다. 사람들아 낮은 걸음으로 우포늪에 가 보시라. 그대의 무릎이 어떻게 가시연잎이 되는지 늪의 물이 알려 주리.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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