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명」의 한(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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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양사람들은 값비싼 개나 말의 족보는 자세히 적어 보관하고 있지만 자신의 족보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것은 일본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이나 일본사람들이 몇백년전의 조상을 들춰내고 일가 사이의 촌수를 따지는 한국의 족보를 보고는 모두 혀를 내두른다.
일본 사람들이 족보에 큰 관심이 없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록을 보면 일본에는 1870년대까지 국민의 95∼96%가 성이 없었다. 오직 사족들만 성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명치유신이후 이른바 태정관포고에 의해 강제로 평민도 성을 갖게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성을 지어 가졌는데,어떤 어촌에서는 집집마다 물고기이름을 성으로 삼았고,어떤 농촌에서는 나무나 야채이름을 성으로 택했다. 심지어는 마을을 글깨나 안다는 사람이 우스꽝스러운 글자로 성을 지어주기도 했다.
현재 일본의 성은 대략 10만개로 추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2백50여성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다. 그만큼 한국인은 조상의 뿌리를 찾는 성씨,다시 말하면 족보에 엄격한 반면 일본을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약속을 어길때의 다짐으로 한국인들은 「성을 간다」고 하지만 일본인들은 「배를 가른다」고 한다. 그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성과 이름을 재일동포들은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산다. 한국식 이름을 가지면 차별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재일 한국인 청소년들은 16세때 외국인등록을 할때까지 자기가 한국국적을 갖고 있는 것도,한국이름과 일본식 이름,이른바 「통명」 두가지를 갖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1세들이 자신이 평생 받아온 차별을 후대에 또다시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에서이지만,그러나 이들이 취직·결혼 등 현실문제에 부닥치면 갈등을 일으키고 좌절을 맛보게된다. 바로 재일동포들의 한이며 비극이다.
엊그제 신문을 보면 취직차별때문에 일본에 귀화한 한 재일동포 도예가가 일본식 이름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법원에개명신고를 내 한국이름을 되찾았다.
「성명은 사람의 존엄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섭받거나 강제될 수 없다」는게 재판부의 결정이유. 제발 이름때문에 차별대우받는 일이 하루빨리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손기상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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