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족보(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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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갓쓴 노인 한 분이 지하철을 탔다. 대학생인듯 한 젊은이가 선뜻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잠시후 노인은 자리를 양보해준 고마움의 표시로 젊은이에게 말을 건넸다.
『관행이 어찌 되신가.』
관행이라니,젊은이는 무슨 말인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관행말일세,관행.』
답답하다는듯 노인이 다그쳤다. 그래도 젊은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옆에 있던 중년신사가 보다 못해 거들었다.
『본관이 어디냐고 물으시는 거네.』
그러나 젊은이는 『아,전주이씨입니다』고 대답했다. 노인은 무엇이 언짢은지 「에헴」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관행」은 물론 관향의 속된 발음이다. 그러나 설사 『관향이 어디냐』고 물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더구나 윗사람이 성씨를 물을 때는 자기성을 「김가」 또는 「최가」로 낮춰야 하는게 예의다. 그래서 노인은 자리를 양보해준 젊은이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관향이란 시조가 난 땅으로 족보의 근원지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 족보는 왕가에서 비롯되었다. 그게 명문·대가를 거쳐 일반 민간에도 전해졌다. 우리나라에 이같은 족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조 초기다. 그후 문중마다 족보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나라 2백50여 성씨가운데 족보가 없는 성씨는 지금 하나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 족보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기재법이 명확하고 집집마다,가문마다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계는 물론 이를 근거로 역사를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미국하버드대학의 동양학연구소에는 우리나라의 온갖 족보를 거의 모두 보관하고 있을뿐 아니라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이 족보연구를 보학이라 하는데 옛날에는 보학에 능통하지 않으면 선비축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이 족보가 첨단시대를 맞아 비디오로 제작돼 화제가 되고 있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만든 「한산 이씨 영상족보」가 바로 그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조상의 숨결을 생생히 전달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손기상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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