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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자 때마다 「눈 도장」행렬 줄이어|회계 허술 자체감사 실시하기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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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녀의 증언.
『회비는 유명무실 한거나 마찬가지였어요. 한다하는 공직자의 부인네들 이었으니까 행사 때마다 각계에서 물품이나 현금을 기부 받아 봉사활동을 했지요. 예를 들어 바자를 연다합시다. 농협에 부탁하면 돗자리나 바구니를 원가로 가져 올 수 있었어요. 상공부를 통하면 비누공장·완구공장·신발공장·메리야스공장 등에서 완제품 중 불량판정은 받았으나 그런대로 쓸만한 물건들을 기부 받을 수 있고요. 물론 아무 이상이 없는 물건도 많이 기증 받았어요. 시계회사에서는 손목시계를 많이 주더군요. 양지회에서 활동한다니까 큰 교회에서도 찬조가 들어오고, 내로라 하는 절에서는 표고버섯을 보내오고…. 안성유기·제주도고사리·고성멸치·기장미역 같은 특산품들이 다양하게 들어왔어요. 회원 중 장성부인들이 많으니 군에서도 협조해 주더군요. 해군에서는 신선한 젓갈을 보내오곤 했어요. 이런 물품들을 우리 회원들이 다시 포장해 바자에 내다 팔았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을 받았지요. 큰 기업체중에서는 특히 K상사와 H물산, 모 자동차 회사 같은 곳이 기부금을 듬뿍듬뿍 내더군요 .바자로 번돈 중 상당부분은 재해민 돕기 사업에 쓰였습니다.』
당시 빌로도는 고급옷감으로 여겨졌다. 몰래 반입하려다 세관에 적발·압수돼 창고에 쌓여있는 외제 옷이나 신발이 많았다. A여사 증언은 계속된다.
『관세청에 부탁해 압수된 물품 중 바자에 내놓을만한 것을 적당한 절차로 인수한 적도 있습니다. 빌로도 옷은 대개 성인용이라 그냥 내놓기 뭐해 회원들이 아동용 옷으로 개조해 팔았지요. 외제신발도 어린이용만 내와 외국상표를 뜯어낸 뒤 판매대에 올렸어요. 하지만 우리 분에 맞지 않는 성인용 외제품은 아예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모금액 점점 불어>
자선바자나 「자선의 밤」행사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한가운데 매년 열렸다. 행사때마다 눈 도장」을 찍으러 온 유력인사와 회원들이 타고 온 승용차로 교통이 혼잡해지곤 해 육 여사는 『서너명씩 약속을 정해 한 차로 와달라』고 회원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바자와 별도로 66년부터 73년까지 매년 벌어진 자선의 밤 행사 역시 성황이었다. 연도별 모금액은 1백만8백원(66년), 3백40만7천원(67년), 4백46만7천3백원(68년), 1천3백18만4천원(69년), 2천4백55만2천원(70년), 7백40만원(71년), 3천5만9천원(72년), 6천6만2천원(73년) 등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액수였다.
이 정도의 상황에서 양지회 「힘」의 원천이랄 수 있는 육 여사(물론 박 대통령의 절대권력이 육 여사의 뒤에 있었지만)는 의외로 회계면의 단속에는 순진했던 것 같다. 증언들을 종합하면 양지회의 자금관리는 총무와 재무간사가 담당했다. 정계실력자나 기업인들이 돈을 기부하고 싶어 안달하는 판에 정작 양지회는 자금의 출납에 따른 영수증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아 70년대 초반에는 자체감사를 하고, 된서리를 맞은 회계담당자는 구멍난 돈을 토해 놓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전 양지회 간부 B여사의 증언.
『회계담당이 교체된 후 장부를 검토한 걸과 현금만 5천만 원 가량이 비었다고 해요. 돈이 모자라면 쓴 실적이 있든가, 물건으로라도 남아있어야 하는데 엉망이었지요 .육 여사님은 이런 면에는 관여하지 않아 알 도리가 없었을 겁니다. 새 회계담당이 박 대통령과 육 여사를 함께 뵐 기회가 있어 이 문제를 건의했고, 그 자리에서 대통령의 내락이 떨어져 자체감사를 벌였어요. 기부금품을 낸 회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확인작업을 했습니다. 결국 전임자한테 돈을 받아내 채워 넣었지요.』

<기업 거짓기부 말썽>
이즈음 어떤 업체는 세무사찰을 받을때 공금을 유용한 사실이 들통나자『양지회에 기부했다』고 거짓으로 둘러대 말썽을 빚었다.
적십자사 같은 다른 단체들의 업무와 양지회의 활동이 중복된다는 지적도 많았다.
타계(74년)하기 1년전인 73년말, 육 여사는 양지회의 간사제도를 폐지하고 자선의 방 같은 대형행사를 없앴다. 당시 청와대의 비서관으로 일하던 선우 연씨는 육 여사로부터『양지회의 활동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지시까지 받았다고 회고했다.
74년의 양지회는 조용했다. 이해 7월15일 소록도에는 나환자중 노인불구환자들을 위한 회관 기공식이 열렸다. 양지회 기금과 국고보조금이 재원이었다. 회관은 육 여사 사후인 11월28일 준공됐다.
양지회는 청와대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번성했다. 회원이 현직 유력자들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속성대로 앞다투어 육 여사의 곁으로 몰려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평가는 아닐 것이다. 정상적인 나라 예산을 집행했어야 할 부분, 또는 광범위한 일반국민의 자발적인 기부로 감당했어야할 분야의 일들을 양지회가 도맡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육 여사가 돌아간 이후 한동안 박영옥 여사(총리부인)체제로 명맥을 이었던 양지회는 76년6월 육 여사추모사업회 측에 사업 일체를 넘기고 공식 해체됐다. 형식적인 마지막 회장은 최규하 당시 총리의 부인 홍기 여사.

<육 여사 송덕비 세워>
1991년11월29일 고 육영수 여사의 생일날, 차녀 박근영씨는 국립묘지 묘소를 다녀온 뒤 전남 나주군의 나환자촌 두 곳에(호혜원·현애원)을 찾아갔다. 20여 년전 육 여사가 집념을 기울였던 장소를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육 여사가 한하운(시인·나병환자)선생님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왔길래 우리 눈을 의심했지요. 우리네 병자와 동승하다니…. 내 손을 잡았을 때는 이제 사람취급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엉엉 울었어요.』
현지 노인들의 회고였다. 나환자촌에는 육 여사의 송덕비들이 있는데, 모두79년의 10·26사태 후에 세워졌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10·26후 상당수 양지회 회원들은 자신이 한때 회원이었다는 사실조차 입에 담기 꺼려했다고 한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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