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영화를 잉태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호 05면

왼쪽부터 시계방향 고흐, ‘초가 지붕의 오두막집’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꿈’에 등장하는 오르세 미술관 모네, ‘파라솔을 든 여인의 산책’드가,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 
고흐, ‘아를의 고흐의 방’ 

영화와 인상주의의 관계는 운명적이다. 우선 둘 모두 사진이라는 19세기의 발명품을 창작의 주요 변수로 삼았다. 사진이 없었다면 에드가 드가(1834~1917)의 움직이는 듯한 발레 그림은 더욱 늦게 발표됐을 것이다. 1895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활동사진’인 영화가 공개됐을 때 화단의 중심세력은 여전히 인상주의자였다. 시각예술의 후발 매체인 영화는 선배 격인 미술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빌렸는데, 특히 동시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영화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마 둘 모두 ‘빛’이라는 창작의 필수조건을 공유하고 있는 것도 큰 이유일 터다. 영화의 시조 격인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빛을 찾아 나서 눈부신 이미지들을 움직이는 그대로 기록한 게 영화의 탄생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속에는 인상주의의 그림들이 끊임없이 유령처럼 출몰한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의 앳된 소녀가 고양이와 놀고 있는가 하면, 장 프랑수아 밀레(1814~75)의 농부들이 들에서 줄을 맞춰 일하고, 오노레 도미에(1808~79)의 세탁부들이 센 강에서 언제 끝날지 모를 노동에 몰두하고 있는 식이다. 영화인들은 부지불식간에 회화에서 익히 봐왔던 친숙한 이미지들을 장면화에 이용했는데, 이런 화면 구성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전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상주의의 성지(聖地), 오르세 미술관

사실 영화가 탄생하기 전에 이미 회화에서, 특히 인상주의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었다. 이를테면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의 산책’(1875)을 보라. 바람에 나부끼는 여성의 머리칼, 이리저리 누워 있는 낮은 풀, 사람의 몸을 싸고도는 공기 등은 곧바로 움직일 듯한 착시를 일으킬 정도로 역동적이다. 드가의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1890)는 또 어떤가. 소녀는 금방 계단 위로 탁 뛰어오를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영화가 프랑스에서 탄생한 사실이 결코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움직이는 그림에 대한 이런 욕구가 없었다면 영화의 탄생은 최소한 몇 년 뒤로 연기돼야 했을 것이다. 혹은 영화는 다른 나라에서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밀레, 39만종39 

이런 인상주의의 걸작들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다. 밀레ㆍ코로 같은 인상주의의 선배들부터 세잔ㆍ고갱ㆍ고흐 등 후기 인상주의까지,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 초를 풍미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모여 있다. 인상주의 흠모자라면 반드시 둘러봐야 하는 인상주의의 성지다.

일본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도 ‘성지순례’에 참가했다. 오르세의 그림들을 행복한 마음으로 영원히 바라보는 것, 감독은 이를 ‘꿈’(1980)이라는 영화로 만들었다. 감독의 분신인 어느 화가는 미술관에서 고흐의 ‘아를의 고흐의 방’(1889)을 바라보던 중 드디어 고흐가 그린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환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초가 지붕의 오두막집’(1890)을 지나고, 고흐 특유의 불타는 색깔이 눈부신 들판을 바라보고, 마지막엔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에서 화가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데까지 백일몽을 꾼다. 영화감독이 화가에게 보내는 흠모의 태도 중 이만한 사례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구로사와는 미술학교에 다닐 때부터 고흐를 사랑했는데, 아흔 살 먹은 노인이 돼서야 뒤늦게 감춰뒀던 애정을 고백했던 것이다. 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꿈’에서 ‘까마귀’라는 소제목이 붙은 이 에피소드는 고흐에 대한 오마주이자 동시에 오르세에 대한 오마주인 것이다.

영화감독이 사랑한 작품, ‘만종’

화가에 대한 감독들의 흠모의 표현은 종종 회화의 인용으로 나타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미술의 전통이 오래된 나라의 감독들 사이에서 이런 사례는 자주 보인다. 오르세의 전시작품 중 아마도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작품이자, 이번에 서울에서 열리는 ‘오르세 미술관 전-만종과 거장들의 영혼’에서도 큰 눈길을 끄는 작품이 바로 밀레의 ‘만종’(1859)이다. 한 농부부부가 들판에서 일하던 중 오후의 기도 시간에 맞춰 경건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장면이다. 신앙과 노동의 거룩함이 동시에 표현된 걸작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하는 엄숙함이 배어 있다.
‘만종’을 인용한 영화는 부지기수다. 최고의 장면을 꼽자면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비리디아나’(1961)를 들 수 있다. 종교적인 희생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한 여성이 거리의 부랑자들을 교육시키던 중 들판에서 기도하는 장면이다. 여성 주인공은 가운데에, 한 남자는 그림 속의 남자처럼 지팡이를 곁에 두고 서 있다. 부뉴엘은 엄숙과 경건, 그리고 참회의 이미지로 ‘만종’을 첫손가락에 꼽았고, 그림대로라면 이 장면에서 부랑자들은 갱생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부뉴엘은 1967년 ‘세브린느’를 발표하며 ‘만종’을 또다시 인용한다. 여기서도 그림은 참회의 순간에 이용된다. 두 경우 모두 스토리 전개에서 볼 때 그림의 의미와는 반대되는 아이러니로 ‘만종’이 이용됐지만, 부뉴엘이 밀레의 그림에 큰 애정을 갖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감독은 친구였던 화가 살바도르 달리로부터 ‘만종’을 처음 소개받았고, 이후 그림의 이미지는 영원히 그의 머릿속에 남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만종’에 대한 달리의 각별한 애정은 유명한 이야기이고, 그는 이 그림을 변주하여 여러 개의 ‘만종’ 리메이크 판을 남기기도 했다.
인상주의가 꿈꾸던 움직이는 이미지의 기록은 영화로 실현됐다. 그 영화는 자신의 미학적 뿌리에 대한 기억을 잃지 않았는지, 그림을 스크린 속으로 불러오고, 화가들의 빛과 색깔에 대한 열정을 재현하기도 한다. 인상주의와 영화의 이런 친화력은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인 장 르누아르가 프랑스 사실주의 영화의 거장으로 성장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아버지는 인상주의 화가로, 아들은 사실주의 영화감독으로 성장한 사실도 인상주의와 영화의 운명이 우연이 아님을 방증한다. 인상주의는 영화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