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을 살짝 버리면 삶은 즐거워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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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12면

사무라이가 소박한 마을 사람들과 일상을 즐기다 복수의 의지가 자꾸 흔들리게 된다는 영화 39하나39. 

1702년 12월 14일, 46명의 사무라이가 주군의 원수를 베어 죽인 후 막부의 명에 따라 전원 할복한다. 주군을 위하여, 조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사무라이들의 복수는 당대의 사무라이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이 사건은 ‘주신구라(忠臣藏)’라는 제목의 가부키로 만들어져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주신구라’는 300여 년의 세월 동안 가부키, 연극, 영화, 드라마 등으로 끊임없이 만들어져왔다. 그 이유는 조직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주신구라’의 사상이 일본인의 정서와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고레에다 히로가즈 감독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가즈의 ‘하나’는 일본인의 고전 ‘주신구라’를 노골적으로 흘겨본다. ‘하나’가 본격적으로 ‘주신구라’를 다루는 건 아니다. 그저 뒤 배경 정도로 깔리지만, 이야기 전체에서 ‘주신구라’의 사상 자체를 확 뒤집어버리고 있다. 아버지를 죽인 남자를 찾아 에도로 들어온 사무라이 소자에몬. 도망자와 떠돌이들이 모여든다는 빈민가에 정착한 소자에몬이지만 어쩐지 복수보다는 마을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일에만 빠져들어간다. 알고 보니 소자에몬은 고향에서도 덜떨어진 인간으로 취급당하는, 무늬만 사무라이인 겁쟁이였다. 게다가 겨우 찾은 원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착한 남자다. 죽일 실력이 안 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이고, 소자에몬은 복수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헷갈리게 된다.

영화 39아무도 모른다39. 

‘하나’의 주제는, 영화 속에서 동네의 바보가 말하는 한마디로 표현된다. ‘벚꽃이 한순간에 아름답게 지는 것은, 내년에 다시 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동안 활짝 피었다가 순식간에 져버리는 벚꽃. 그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무라이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가즈는 반대로 말한다.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더 중요해, 라고. 빈민가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살아간다. 힘든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일상의 소중함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반면 소자에몬은 늘 짓눌려 있었다. 사무라이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해, 라는 관념적인 이상에 휘둘리다가 에도까지 왔다. 그러나 빈민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면서 소자에몬은 깨닫는다. 의미보다는 생활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소자에몬의 복수가 오락가락하는 동안, 역시 빈민가에 숨어 지내며 언젠가 주군의 원수를 갚으려는 사무라이들의 우스꽝스러운 행각도 펼쳐진다. ‘하나’는 “의미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고레에다 히로가즈의 생각을 그대로 만든 영화다.

어떻게 죽든, 인간의 ‘죽음’이야말로 고레에다 히로가즈가 천착해왔던 주제다. 2005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어린 4남매가 삭막한 도시에서 외톨이로 살아가다가 한 아이가 죽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도 그들을 돌보지 않고,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삶을 계속한다. ‘디스턴스’(2001)에서는 독가스 테러를 감행한 옴진리교의 남은 신자들이,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원더풀 라이프’(1999)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일생의 가장 소중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 떠나간다. 베니스영화제 황금오셀리니상을 받은 데뷔작 ‘환상의 빛’(1995)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살한 남편의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여인이 나온다.

고레에다의 모든 영화에는 죽음이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평화롭던 일상이 누군가의 죽음 때문에 한순간에 붕괴하기도 하고, 산 자와 죽은 자의 기억이 겹쳐지기도 한다. 죽음은 단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기억에 스며들고 일상을 비틀어버린다. 반대로 ‘원더풀 라이프’처럼 죽은 자가 산 자의 기억을 간직하고 행복해하기도 한다. 죽음이란 행복한 것일까, 슬픈 것일까. 진실이 무엇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고레에다는 늘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을 보여주었다. ‘환상의 빛’과 ‘디스턴스’의 마지막은 다시 출발점에 서 있는 주인공들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죽은 동생을 매장하고 돌아오는 남매의 처연한 모습으로 끝난다. 한 아이가 죽었지만, 남은 그들은 여전히 이 도시에서 살아갈 것이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남은 자에게 변화된 일상을 가져오는 변수일 뿐이다. 사무라이들의 생사관과는 정반대로 고레에다에게 죽음이란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이다.

고레에다 히로가즈에게 중요한 것은 삶, 사람들의 생활 그 자체다. 1962년생인 고레에다는 TV방송국에서 동성애자, 재일한국인, 기억상실증 환자 등 사회적 약자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부작용과 알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대만의 영화감독 후샤오시엔의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감명을 받은 고레에다는 극영화로 전향한다. 고레에다는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판타지풍의 ‘원더풀 라이프’건,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디스턴스’건 상관없이 고레에다는 일본인의 삶 깊숙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시대극인 ‘하나’도 마찬가지다. 전작들과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현대 사회의 비극을 담담하게 응시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들을 껴안아준다는 것이다. 그만큼 여유롭고, 그만큼 보는 사람도 즐거워진다. ‘감정적으로 강요하는 파시즘은 내 영화에 없다’는 자찬의 말이 딱 들어맞는다. ‘하나’는 ‘주신구라’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인 동시에, ‘아름다운 일본’ 등의 모호한 말장난으로 일본 국민을 호도하는 ‘극우’까지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현명한 영화다.  

김봉석씨는 영화·만화·애니메이션·게임·음악 등 대중문화 전반을 투시하는 전방위 평론가로 'B딱하게 보기'를 무기로 한 '봉석 코드'의 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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