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어렵나, 괜찮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호 19면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를 좋아할까, 안 좋아할까?

어닝쇼크 삼성전자 관전법

한때 시장에서 유행하던 퀴즈였다. 정답은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를 가장 싫어한다’였다. 반도체가 삼성전자에 많은 돈을 벌어주는 효자이지만 그만큼 투자를 많이 해야 하고 수급에 민감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골치 아픈 제품이라는 애기다.

바꿔 말하면 삼성전자가 향후에 먹고살 안정적인 차세대 리더 상품에 대한 갈망이 크다는 의미다. 이 회장은 입버릇처럼 “향후 10년 뒤 먹고살 상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그는 최근 “정신 안 차리면 4~6년 후에는 큰 혼란이 온다”고 말했다. 이를 놓고 일부에서는 ‘이 회장 특유의 엄살’이라고 한다. 하지만 13일 삼성전자의 1분기 실적이 발표되자 시장은 ‘어닝 쇼크’라며 충격이라고 했다. ‘삼성전자가 정말 어렵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시장에서 기업을 뜯어볼 때 가장 먼저 보는 게 영업이익률이다. 그런데 삼성전자의 영업이익률은 매년 크게 떨어지는 추세다. 2004년 20.9%에서 2005년 14.0%, 2006년에는 절반 수준인 11.8%로 뚝 떨어졌다. 마침내 올 1분기에는 8.2%로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다. 삼성전자의 주가가 1년 새 23%나 떨어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삼성전자 내부는 요즘 ‘카오스 상태’=이를 놓고 삼성전자를 책임진 실무 경영진은 일시적인 시장 상황의 문제일 뿐이라고 해명한다.

한 임원은 “삼성전자의 경영 리더십이나 제품 포트폴리오 등 구조적인 문제는 없다”고 했다. 그는 “이건희 회장과 윤종용 부회장의 리더십은 건재하고 황창규ㆍ최지성 사장으로 이어지는 지휘라인도 잘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다만 “시장 상황의 문제” 라는 말이다. 시장 상황의 문제란 곧 최근의 환율 문제와 메모리값 하락을 뜻한다. 그러나 이 임원은 “환율은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문제라 이미 적응된 상태고, 메모리 가격은 올 2~3분기를 기점으로 바닥을 칠 것”이라며 낙관적이라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분기당 20억 달러씩 이익을 내는 기업이 전 세계에 얼마나 되느냐”고 반문하며 삼성전자의 위기론은 과장된 것이라고 했다.

이학수 그룹 전략기획실장도 “삼성전자는 선방하고 있다”며 “올해 세전 이익도 지난해의 8조원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는 말로 놀란 시장을 다독였다.

어느 기업이나 재무통은 비관적이다. 삼성전자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최도석 사장도 최근 “황창규(반도체 총괄) 사장이 나에게 반도체 실적이 2분기부터 좋아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에 대해 나는 물음표”라고 했다. 하지만 그도 “3분기부터는 낙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뜻 보면 오너인 이건희 회장은 비관적이고, 전문경영인들은 낙관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삼성 관계자는 이를 역할의 차이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끊임없이 ‘위기론’을 던져 조직이 타성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카오스 메이커(Chaos makerㆍ혼돈 제조기)’가 이 회장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회장의 발언 뒤 삼성전자 CEO들의 자기 반성과 내부 질책이 경쟁하듯 이어지고 있다.

황창규 사장은 최근 “(이 회장의) 위기론에 100%로 공감한다”며 “반도체 부문만큼은 그런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몸부림을 쳐왔지만 냉철하게 보면 세계시장을 뒤집을 만한 수준은 아니라 내심 반성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사업부문 회의에서는 임원들을 향해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면 회사를 떠날 준비를 하라”며 다그쳤다.

반도체와 함께 삼성전자를 이끄는 쌍두마차인 정보통신사업 부문도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올 초 이기태 부회장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최지성 사장은 지난달 “삼성이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지나쳐 고객의 요구를 파악하는 데 소홀했다”고 했다.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저가폰이 시장을 이끌어가는 데도 고가폰 전략만 고수, 시장 트렌드를 주도하지 못했다는 외부 지적을 의식한 고백이다. 지난해 히트작인 ‘보르도 TV’로 삼성 LCD TV를 세계 정상에 올려놓은 그는 삼성 내부에서 ‘타고난 장사꾼’으로 불린다. 그도 요즘 직원들에게 “악바리 정신을 가지라”며 신시장 개척을 독려하고 있다. 취임 초에는 기획ㆍ인사ㆍ마케팅 관련 본부인력의 근무지를 삼성 본관에서 수원 사업장으로 옮기며 분위기를 일신하기도 했다. 언제쯤 성과가 날 것인지에 대한 주변의 물음에 그는 ‘세상을 바꾸는 데 1년이면 족하고 3년이면 늦다’는 당태종의 신하 위증(魏甑)의 말을 인용하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시황에 흔들리는 것 자체가 문제”=이 회장의 위기론이 단순히 ‘조직 다잡기’ 차원이라면 어느 정도 효과는 본 셈이다. 하지만 그가 가리키는 ‘달’은 손가락 그 너머에 있다. 삼성전자가 지금처럼 시장 상황에 휘청거리는 구조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 회장이 요즘 갈망하는 것은 삼성전자가 시황이나 환율에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차세대 리더 상품이다. 연초부터 창조경영을 꺼낸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윤종용 부회장의 최근 행보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윤 부회장은 삼성전자 내의 또 한 사람 ‘카오스 메이커’다. 구체적으로는 그는 이 회장이 화두를 제시하면 이를 구체화해 임직원에게 전파하는 ‘대리인’ 역할을 한다.

그가 2월 주총에서 꺼낸 ‘바람개비론’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바람이 불지 않아 바람개비가 돌지 않을 땐 바람개비를 든 사람이 앞으로 달려나가면 돌게 된다”고 했다. 시황 개선이라는 ‘바람’만 기다려서는 결코 초일류 기업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바꿔 말하면 ‘카오스’를 만드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말이다.

신수종 사업을 향한 갈증은 삼성 내부에서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지금 잘나가는 핵심 사업이 언제 사양화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차세대 리더 상품으로 각광받던 LCD 사업이 후발 업체들과의 치열한 경쟁으로 최근 수익성이 크게 악화된 것이 단적인 예다. 특히 중국의 추격에 대한 두려움은 일반의 상상보다 크다. 이와 관련, 삼성 관계자들이 자주 거론하는 사례가 ‘전자레인지의 몰락’이다. 한때 수원공장에서 생산한 전자레인지는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삼성 브랜드를 세계 시장에 전파시킨 효자상품이었다. 하지만 중국 가전업체인 갈란츠 등의 공세에 밀려 2004년에는 생산라인을 말레이시아로 옮겨야 했다.

이건희 회장, 윤종용ㆍ이학수 부회장은 23일 중국 베이징에 집결한다. 겉으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 회장의 스포츠 행사 참석이 이유다. 하지만 삼성 수뇌부 3인이 해외에서 회합을 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위기론을 던지고 유럽으로 훌쩍 떠난 지 한 달째. 이 회장이 지금 갈망하는 대로 ‘시장에 휘둘리지 않고 수익을 내는 상품’을 찾아내는 행보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