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황세희의몸&마음] 내 아이 내가 잘 안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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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내 지은 농사, 내 모르리!"

내 자식을 내가 잘 파악하고 있다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확신은 철옹성처럼 견고하다.

실제 어머니들은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로 우는 이유를 알아채고, 눈빛을 통해 아이의 바람을 읽는다. 애정을 담은 잦은 접촉으로 아이의 행동과 습관을 쉬 파악한 덕분이다. 하지만 이는 자녀의 문제점을 쉽게 간과하는 '눈 먼' 사랑으로 변질될 위험도 상존한다.

수업 시간에 또래 친구들을 늘 집적거려 말썽꾸러기로 통하는 여덟살 K군. 몇 번 주의를 줘도 개선 기미가 없자 마침내 담임 선생님은 어머니를 불러 소아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또래 남자애들이 다 그렇다. 별난 거 아니다"며 불쾌한 표정만 짓고 돌아갔다. 귀한 내 아들의 문제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태도 변화가 없는 한 K군은 앞으로도 또래에게 따돌림받는 문제아로 남을 것이다.

저학년 땐 활발한 성격의 모범생으로 통했던 L양(9).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떨어지면서 말수도 줄고 짜증 많은 아이로 변했다. 어머니는 L양을 닦달하며 밤 늦게까지 공부를 강요했다. 하지만 별반 효과가 없자 '학습클리닉'을 방문해 지능.정서 반응 등 몇 가지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L양의 지능(IQ)은 80으로 낮았지만 정상범위였고 정서는 우울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능이 낮은 편이었지만 학습량이 적은 저학년 땐 어머니의 정성으로 상위권에 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복잡한 이해력이 요구되는 상급 학년이 되면서 성적이 하위권을 맴돌았던 것이다. 우울증은 아이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하루종일 공부만을 강요한 탓에 초래됐다. 담당 의사는 놀이 시간을 충분히 줄 것과 우울증 치료를 권했지만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했는데, 머리가 그 정도 나쁠 리 없다"며 곧바로 병원문을 나섰다.

인간은 소중한 것을 투자할수록 투자 대상에 대한 기대 수준도 키워가는데, 정도가 심해지면 기대를 믿음으로 변화시키는 속성이 있다.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다. 이런 상황에선 기대를 저버릴 수 있는 어떤 조언이나 사실에도 눈과 귀를 닫는다. 상상만 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애인의 배신 가능성, 투자금을 날릴 위험성 등에 대한 경고는 물론, 수십년간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준 자녀 문제에 이르러선 두말할 나위도 없다.자식이 큰 문제를 일으켰을 때, 가장 당황하는 사람이 부모인 경우가 흔한 이유다. 세계를 경악시킨 버지니아공대 참사의 범인 조승희의 가족도 "승희가 그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진정 자녀를 사랑하고 훌륭하게 키우고 싶다면 부모야말로 자식에 대해 가장 부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자녀가 객관적 평가를 받도록 하자. 다행히 교우 관계, 지능 및 적성, 정서 상태 등을 평가하는 좋은 도구는 많다.

내 아이가 뭔가 이상다 싶거나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거나 다른 행동을 할 때, 남들로부터 아이에 대해 싫은 소리를 들을 때, 내 아이의 정확한 상태가 궁금할 때, 주저 없이 전문가 평가를 받는 일이야말로 아이 사랑의 출발점이다.

황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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