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차, 이제는 디자인 승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5면

이달 초 서울모터쇼를 찾았다. 필자가 디자인한 GM의 컨셉트카가 전시돼 디자인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다. 한국은 산업 역사가 짧아 선진국들이 시간을 두고 거쳐야 했던 과정을 압축, 발전해 왔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최근 발전을 거듭해 세계적으로 평가를 받은 국산차들이 국내 소비자로부터 디자인에서 질타를 받는 것을 보면 국내 자동차 디자이너(기아자동차)로 일했던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프다.

 한국의 자동차 개발 역사가 선진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다 보니 디자인 업무 영역이 모호한 경우가 많다. 디자인을 훈련받지 않은 영업·마케팅·연구소 등 몇몇 부서에서 일반적인 통계 수치를 들이밀면서 자동차 골격의 미(美)에 대한 판단 기준을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대부분 결정된 골격을 놓고 화장을 시작하는 게 국산차 디자이너의 현실이다.

 지금 국산차 디자인은 세계 수준과 근접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렇다면 정해진 틀에서 화장을 해왔던 디자이너의 역할을 이제부터라도 마음껏 넓혀줘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신차개발 초기 단계, 뼈대를 만들어 가면서 타이어 크기나 차체의 높이 등 성능 및 기술 검토를 할 때 디자이너의 미적인 판단이 함께 있어야 한다. 선진 자동차 업체들은 이런 단계에 적극적으로 디자이너들을 참여시킨다.  

GM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미국 디자이너들과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다. 그건 지식이나 디자인 실력이 아니었다. 바로 자동차의 역사였다. GM 디자이너 상당수는 태어날 때부터 자동차에 빠져 있는 소위 ‘카 키드’였다. 자동차 경주를 좋아한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집 한쪽에 마련된 개러지(창고)에서 자동차를 뜯고 고치고 또 여러 차를 경험해 보면서 자라온 세대다. 자동차를 고치고 조립해 보기는커녕 제대로 타보지도 못하고 자랐던 우리 세대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가 많다.

 최근 국산차 디자인의 ‘고유의 정체성(아이덴티티)’에 대해 질문이 나온다. 몇몇 유명 디자이너들이 국산차를 보고는 상품이나 품질은 우수한데 고유의 디자인 요소가 없다는 지적을 하곤 했다. 그걸 “패밀리 룩(공통된 디자인 요소)”으로 해석을 해 일부 메이커는 눈·코·입 등 비슷한 얼굴 만들기에 주력을 한다. 이는 근본을 도외시한 미봉책이다. 힘을 합쳐 하나 둘 정성스러운 히트 작품을 내다 보면 저절로 회사의 얼굴이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그 회사만의 독특한 디자인 요소가 결정되는 것이다.

김영선 (GM 디자인연구소 수석 디자이너)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