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2부] 즐거운 집(3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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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우리는 첫 번째 만남을 그렇게 끝냈다. 엄마의 아파트 입구에서 내려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서너 살쯤 된 꼬마가 작은 배낭을 메고 걸어왔다. 그 뒤에는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한번 힐끗 보더니 꼬마의 두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빠 열 밤 자고 올게. 할머니랑 엄마 말씀 잘 듣고 있어. 그때는 가을이 될 테니까 우리 놀이 공원 가자."

그러자 꼬마가 대답했다.

"아빠 열 밤 자고 꼭 와."

젊은 아빠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약간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모를 것이다. 그때 내 마음 속으로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가고 있었는지를. 내가 그 꼬마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으며 그 아이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을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예견하고 있는지를. 어린 그 꼬마에게 열 밤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영원과도 같은 시간들일까. 딩동, 하고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아이의 할머니인 듯한 사람이 내리더니 아이를 안았다. 아이가 할머니 품에 안겨 힘없이 고개를 푹 파묻었다. 잠시 후, 남자가 "아빠 간다" 하고 인사를 하자 꼬마는 잠깐 고개를 들었는데, 나는 차마 그 꼬마의 눈도 그 아빠의 눈도 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 세상 천지에 내가 머물 지붕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도로 아파트를 나와 그냥 걸었다.

하염없이 걷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E시의 할머니였다.

"위녕, 잘 지내고 있지? 좋으냐 에미랑 사는 거?"

내가 "응" 하고 대답하자 할머니는 웃었다.

"오늘 애비 너 만나러 간다던데그래, 애비하고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좋지?"

"으응… 아니… 실은, 실은 아니야 할머니. 내가 아빠한테 또 잘못한 거 같아…."

할머니는 무슨 말인가 할 듯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왜 오랜만에 만나서 애비 마음을 또 상하게 하고 그러니? 너 보내놓고 애비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데."

"할머니, 아빠는 행복한 적이 없대."

내가 힘없이 대꾸하자 할머니는 수화기 저쪽에서 "그래?" 하고 반문했다.

"응, 없대. 좋은 적도 없고."

할머니는 잠깐 생각을 하는 듯 망설이더니 말했다.

"참 이해가 안 가는구나. 마누라 있고 딸 자식 있고 어쨌든 너도 에미에게 가서 잘 적응하고 있고 그런데 뭐가 안 행복하냐? … 나는 노인정에서 광 팔고 나서 다른 사람들 열심히 화투 치는 동안 뜨듯한 바닥에 등 대고 누워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던데."

마음이 아주 무거워져 있었는데 뜻밖에도 내 입에서 푸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고난을 당할 때 필요한 건 유머라는 말이 더욱 실감이 났다. 그리고 웃음이란 좋은 것이었다. 할머니가 광을 팔고 나서 뜨뜻한 노인정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 것을 생각하자, 내 등도 따라서 따뜻해 오는 것 같았다.

"위녕, 행복이란 건 말이다. 누가 물어서 네, 아니요로 대답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란다. 그건… 죽을 때만이 진정으로 대답할 수 있는 거야. 살아온 모든 나날을 한손에 쥐게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지, 요한 바오로 2센가 얼마 전에 죽은 교황 봐라. 그 양반 젊었을 때는 키도 훤칠하고 잘도 생겼던데 남들 다 좋아라 하는 교황 되어서 무슨 병인가 걸린 거 너도 봤지? 전 세계 텔레비전에 침도 질질 흘리고 손도 덜덜 떠는 거 날마다 생중계되는 거 말이야. 그 사람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힘들었겠니? 그래도 죽기 전에 말하지 않던,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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