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총으로 피바다 … 이번엔 동영상 강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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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주 블랙스버그의 한 식당에서 18일 손님들이 NBC방송이 방영한 권총을 든 조승희의 모습을 보고 있다. [블랙스버그 AP=연합뉴스]

하늘이 차츰 어두워 가던 18일(현지시간) 저녁. 33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이 사흘째로 접어들면서 미국 블랙스버그의 버지니아공대 캠퍼스는 조금이나마 평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이 캠퍼스는 또다시 깊은 충격에 빠져 들었다. 총기 난사범 조승희가 1차 범죄 직후 방송사에 우편으로 보냈던 동영상과 글이 섬뜩한 실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날 대부분의 교직원과 학생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학교에 남아 있던 소수의 학생들은 기숙사와 인근 카페에 삼삼오오 모여 NBC 채널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녁 7시 '나이틀리 뉴스'가 시작되고 예고대로 조승희의 동영상이 공개되자 "아니…" "저런"이란 탄식이 실내를 메웠다.

머리를 짧게 깎은 조승희가 권총을 겨누거나 망치를 들어 머리를 내리치는 시늉을 하는 모습, "나쁜 ××들, 너희는 내 몸에 대못을 박았다" "양쪽 귀까지 입을 찢기는 기분이 어떤지 아나"는 등 적개심 가득 찬 내용을 읽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탄식은 무거운 침묵으로 바뀌었다. 특히 그가 범행 당시 입었던 복장 차림으로 동영상 속에 나온 것을 본 학생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학교 인근 카페에서 방송을 본 학부 1년생 헤더 브렌난은 "그의 옷을 본 순간 모든 것을 준비했던 치밀한 계획 범죄임을 확실히 깨달았다"며 "멀쩡한 머리로 범죄를 준비한 지능범인지 정신병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며 치를 떨었다.

2년생 대니얼 티슬러는 "끔찍했던 그저께(16일 사건 당일)가 재연된 느낌"이라며 "너무나 냉정하게 선언문을 낭독하는 조승희를 보니 온몸이 떨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어 "그의 범죄는 순간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한 뒤 벌인 증오의 '작품'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신원을 밝히기 꺼린 한 여성은 캠퍼스 앞 스테이크 식당에 어린 딸을 데리고 나왔다가 업소 TV에 조승희의 섬뜩한 모습이 등장하자 "아이에게 보여 주기 겁난다. 채널을 돌리거나 텔레비전을 꺼 달라"고 종업원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버지니아공대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한 미국인 기자는 "이틀 전 권총과 쇠사슬로 버지니아공대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조승희가 이번에는 동영상과 사진으로 다시 한번 학교를 강타했다"고 말했다.

NBC의 보도에 대해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처사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이날 NBC 나이틀리뉴스의 시청률은 평소의 두 배 가까이 치솟는 등 미국인들은 조승희의 동영상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거친 욕설과 저주.분노의 표현이 담긴 범인 조승희의 일방적인 주장을 반복적으로 내보낸 것은 경솔한 언론의 상업주의라는 비난도 이어졌다.

사건을 수사 중인 버지니아주 경찰 당국은 19일 오전(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증오가 담긴) 조승희의 영상 등이 일반에 방영된 데 실망했다"며 "최근까지만 해도 이런 종류의 영상들은 수사관들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버지니아공대 학생들은 NBC의 방송이 나간 뒤 워싱턴 포스트 등 언론사에 "NBC의 방송이 성급했으며 슬픔에 잠긴 유족이나 친지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의견을 전했다.

이런 비판 여론에 대해 NBC 측은"사안의 예민성과 시청자의 알권리 등 보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했으며 방영 내용은 최대한 여과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블랙스버그=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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