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사태 마구잡이 공개가 화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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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88,89년 봇물… 형식만 갖추면 허용/상장후 1년 못넘긴 기업도 3개
최근의 상장사 부도사태는 비록 파급효과가 크긴 해도 닥칠일이 닥치는 것이지 경제가 갑자기 나빠진 증후군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88∼89년의 무리한 「기업공개드라이브」가 빚어낸 예측 가능한 결과기 때문이다.
90년 9월 대도상사의 법정관리 신청이후 1년6개월동안 무려 22개의 기업이 쓰러졌는데 이중 88년에 공개된 것이 9개사,89년에 공개된 것이 6개사로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상장한지 1년도 못돼 부도를 낸 기온물산·케니상사·영원통신 등 3개사의 경우 증권감독원 특별감리결과 한결같이 90년 12월 결산에서 적자를 흑자로 둔갑시켜 91년초 「사기」 공개를 한 기업이었다.
또 부도기업중 절반에 가까운 9개기업이 여성의류·가죽옷·블라우스 등을 만들어 수출을 주로 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외국상표를 들여와 내수판매를 하는등 경쟁력이 약한 의류업체였다. 또 카스테레오·오디오를 만들어 수출하던 5개기업이 덤핑판정으로 수출길이 막히자 줄줄이 쓰러졌다. 어묵·조미오징어등 수산식품가공업체와 카메라·렌즈제조업체도 각각 둘이나 됐다.
부도의 직접적인 원인은 어느기업이나 항상 수출과 판매부진,금융비용증대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애당초 그같은 부도원인에 쉽게 노출되는 기업들은 공개하지 말아야했던 것이다.
증권당국은 88년에 1백11개사,89년에 1백25개사를 공개시켰다. 91년말 상장사가 6백86개사이니,2년동안에 무려 상장사의 34.4%를 공개시켰다는 이야기다. 이때 「형식만 갖추어」 공개된 상당수의 「속빈 강정」들이 계속 거꾸러져 요즘 증시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3저호황 끝물에 증시가 활황장세를 보이자 당국이 공개드라이브 정책을 폈을 때는 다들 좋았다.
일부 기업들은 공개전에 대규모 유·무상증자를 실시하는 이른바 「물타기」를 했다. 공모가를 자산가치나 수익가치보다는 이미 상장돼 있는 같은 업종의 주가를 기준으로 한 상대가치를 적용해 발행가를 부풀리기도 했다. 증권사 직원들이 한두달 작업한 기업내용 분석결과를 가지고 오면 숫자 틀린 것이나 잡아주는 증권감독원의 당시 감리로선 부실공개기업을 가려내는데 역부족이었다.
증권관리위원회나 대장성이 직접 2∼3년에 걸쳐 치밀하게 기업내용을 분석한뒤 공개여부를 결정하는 미국이나 일본과는 사뭇 다르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증권당국은 뒤늦게 90년 3월,91년 9월 두차례에 걸쳐 자본금한도를 높이고 심사를 강화하는등 공개요건을 다시 까다롭게 바꿨다. 올해도 27개사(공모액 2천5백37억원)가 기업공개를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나 제대로 공개돼 건전한 시장을 이루는데 기여할지 두고볼 일이다.<양재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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