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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간판장이의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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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러나 소년은 새 길을 찾았다. 열여덟 살, 대구의 한 극장에 취직했다. 간판 그리는 일이었다. 조수로 들어갔지만 운이 트이려고 그랬는지 스승을 잘 만났다. 간판장이 책임자가 일제시대 도쿄에서 명문 미대를 나온 프로였던 것이다. 일취월장, 소년의 실력은 부쩍 늘었다. 이류극장 몇 곳을 거쳐 스물네 살 나이에 개봉관인 제일극장의 간판 책임자로 스카우트됐다. 이어 대구극장에서도 그를 모셔갔다.

좋은 시절이었다. 1973년, 서른 살 청년은 서울로 진출했다. 미군부대가 있던 용산 삼각지엔 미국.유럽으로 수출하는 그림과 미군 초상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화실이 많이 있었다. 극장 간판을 캔버스 삼아 갈고닦은 청년의 인물화 실력이 빛을 발했다. 카우보이, 플라멩코 춤추는 장면 등 주문서대로 그림을 '제조'했다. 바이어들은 잘 그린 그림과 어설픈 그림을 기막히게 가려냈다. 실력을 인정받은 청년의 60호짜리 그림 값은 최대 1000달러. 중동 파견 근로자가 한 달에 800달러 받던 시절에 월수입이 1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내친김에 친한 바이어의 권유를 받아 사우디아라비아.미국에서 10년간 상업화가 대접을 받으며 일했다. 90년, 고향이 그리워 한국에 돌아왔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두 번은 무지개 같은 나날이 찾아온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 삼각지의 '수출 그림' 호황은 90년대 들어 막을 내렸다. 중국산 짝퉁 그림의 가격 경쟁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2002년, 심근경색이 찾아와 수술까지 받았다. 3년간 요양하고 나니 돈은 떨어지고 손은 굳어 있었다. 2006년 12월, 전부터 알던 인사동 미술품 중간상이 찾아왔다. "한 점당 25만원을 줄 테니 유명 화가 그림을 베껴 달라"고 했다. 그냥 가정집에 걸어놓을 것이니 염려 말라는 말도 했다. 설마 괜찮겠지 하면서 원로 화가 이만익의 그림 19점을 베껴 그렸다. 더 진짜처럼 그릴 수도 있었지만, 100호당 25만원으로는 좋은 물감을 살 수 없어 실력을 100% 발휘하지 못했다.

위조 미술품 유통조직 수사는 마약사범 수사만큼이나 어렵다. 위작 여부부터 가리기 쉽지 않은 데다 점조직이라 툭하면 연결 고리가 끊어진다. 서울 서초경찰서 이규동(46) 경감 등 위조 그림 수사팀은 두 달 동안 야근을 밥 먹듯 했다. 미행과 휴대전화 추적을 거듭한 끝에 지난달 28일 경기도 파주의 '공장'에서 이만익 화백의 그림을 베끼던 전직 극장 간판 화가 노모(64)씨를 붙잡았다. 이어 복모(51)씨 등 다른 일당도 체포했다. 이중섭.천경자.박수근 등 이들이 베낀 유명 화가의 그림 99점은 진품이라면 모두 1011억원어치나 된다. 이중섭 그림 위작 시비가 채 잊히기도 전에 또 터진 짝퉁 사건이다. 노씨는 기자에게 "붙잡히고 나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을 받고 나면 진짜 내 창작품을 그려 화단의 평가를 받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오랜 소망이라고 했다.

노씨의 죄는 밉지만 실력은 아깝다. 국내의 짝퉁 그림 화가는 줄잡아 1000여 명. '쫑쫑이 그림'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작품은 벼룩시장이나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노씨는 그중 30위 안에 드는 실력파. 이만익 화백 본인이 감탄할 정도였다.

선진국처럼 우리도 저작권자와 정식으로 계약한 뒤 모사한 명작 짝퉁 시장을 양성화할 수는 없을까. "박수근 특유의 토속적인 질감을 사진이 아니라 똑같은 재료와 기법으로 베낀 모사품으로 감상하고 싶어 하는 미술 애호가가 꽤 많다"고 손철주 학고재 주간은 말했다. 따지고 보면 미술품 위작 사건도 진품과 인쇄된 복제품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