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기 든 시위대 “옐친은 나쁘다”/엄청난 군중에 주최측도 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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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레닌초상화 든 사람들 대부분 노인·부녀자/4∼5배 비싼 극우파 신문불티/노동자당 돕기 성금도 쏟아져
【모스크바=김석환 특파원】 공산주의 노동자당등 반정부 세력이 보리스 옐친의 시장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와 옐친정책에 시간적 여유를 주장하는 대응시위로 9일 모스크바는 크게 술렁거렸다.
지난해 8월 쿠데타 실패후 불법화 되고 중앙당 조직이 해체된 공산당 및 외곽조직들은 9일 모스크바 마네슈 광장을 구소련 국기인 적기와 공산당부활·보리스 옐친 대통령 타도를 외치는 함성으로 가득메웠다.
영하10도를 오르내리는 쌀쌀한 날씨속에서 『예딘스트보』(단결) 『나로드』(민중) 『아르미야』(군대)를 함께 외치는 군중들은 역사의 시계바늘마저 거꾸로 돌려놓겠다는 기세였다.
이날 오전 10시쯤 모스크바 지하철 파르크이쿨트라역 앞에서 2천∼3천명의 행진으로 시작된 시위는 11시쯤 불어나기 시작했고 마네슈광장에서 본격적인 연설로 달아오른 오후 2시쯤 30만명(주최측 주장)에서 12만명(인테르팍스등 러시아 언론)의 군중이 인해를 이루었다.
붉은 완장과 모피코트로 정성들여 장식한 레닌의 초상등을 들고 모여든 군중들은 대부분 노인·부녀자들 이었지만 그들을 독려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레닌배지의 콤소몰 회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콤소몰 회원들이 독려
이날 시위를 주도한 빅토르 안필로프(모스크바 노동자단체 지도자)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러시아 자유당 당수) 자신들도 이렇게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 것이라 확신하지 못한듯 했다.
연단에 오른 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어조로 우바자 에미에 타바리시(경애하는 동지들)를 연발했고 군중들은 사베츠 소유즈(소련) 예딘스트보(단결)로 맞장구쳤다.
연단 바로뒤 모스크바호텔 입구에서 아코디온을 들고 소련군가와 인터내셔널 등을 연주하던 프라스코비야 예고로바 할머니는 기자들을 향해 『사진만 찍지말고 민중들의 외침을 글로 적으라』고 호통을 쳤고 아버지·친구들과 함께 붉은깃발을 들고 모스크바시 레닌그라드 대로에서부터 행진해 왔다는 세르게이 바다로프(15) 소년은 『옐친은 나쁘다』며 친구아버지·형제들의 실업과 생활의 어려움을 그 이유로 들었다.
『옐친 대통령은 시장경제로의 이행이 풍요한 생활을 보장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빵값이 옛날보다 10배 이상 올랐다. 사회주의가 소련을 파멸시켰다지만 그때에는 식탁위에 빵이 항상 가득했다』는 불만들이 시위도중 이곳저곳에서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빵값 10배나 올랐다”
일반신문 값보다 4∼5배나 비싼 1부에 3루블씩 하는 극우파신문 젠,골로스 라보체보 등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공산주의·노동자당 등의 재정을 돕기위한 모금통에 5루블,3루블짜리 지폐가 수도없이 쏟아져 들어갔다. 공산당의 잔존세력의 힘이 아직은 상당함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한편 같은시간 러시아 최고회의 청사 뒤편에서 민주주의 사수를 위한 대항시위를 벌였던 민주러시아 등은 약7만∼10만명(언론보도)의 시민을 동원해 『옐친!』『옐친!』을 연호했고 민주주의 만세등을 외치고 있었다.
글렘 야쿠닌(민주러시아공동의장)등 연사들은 연신 현재의 개혁만이 러시아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보리스 옐친,예고르가이다르 당신들과 당신들의 개혁조치는 옳다』『루츠코이 우리는 당신에게 옐친과 하나가 되라고 선출했지,그를 비난하라고 선출한 것이 아니다』는 등의 피킷과 플래카드 속에서 『지난해 8월 민주주의 사수를 위해 숨져간 희생자들의 피값을 헛되이 하지말자』는 포스터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삼엄한 경계 충돌 없어
가격자유화 조치 실시후 기대한대로 물자부족 현상과 생산침체가 해소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타난 이와같은 시위와 공산당 부활움직임,민주세력과의 첨예한 대립등은 러시아의 정치불안을 가속화 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날 경찰의 삼엄한 경계와 두 대립되는 세력의 격리로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더욱 잦아질 양세력간의 시위와 「투쟁」「사수」의 구호가 평화로운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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