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전국 엿장수 죄다 울산에 왔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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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조선소 건설의 최대 장벽은 기술 문제였다. 자금을 끌어들이는 것은 첫 장벽을 넘는 것이었다. 내 주머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 주머니에서 빼오는 것이라 차관 도입이 가장 넘기 어려운 장벽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수차례에 걸쳐 조선 기술자들을 모집했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 전국에서 구름처럼 지원자들이 몰려왔지만 조선소가 원하는 기술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26만t급 선박을 건조해야 했으니 당시 형편을 들으면 누구라도 비웃을 일이었다. 이정일 전 미포조선 회장의 회고도 함께 들어보았다.

“현대가 1972년 3월에 기공식을 하고 그해 연말까지도 내 기억으로는 엔지니어들을 영국하고 일본으로 교육을 보냈어요. 영국도 몇십 명이 갔지만 일본으로 많이 보냈어요. 그래 가지고 일찍 교육 갔다왔던 사람들이 배를 건조할 기능사원들을 교육하고 그랬거든요? 선박 공장도 그때 막 기초가 올라가고 완성이 안 됐고 도크도 안 돼있었으니까 기능 인력들을 그냥 놀릴 수 없어 교육을 했는데 이게 교육이 제대로 됩니까? 요즘 기능공들에 비해 순수한 면에서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성이 착했지만 심성만 가지고는 안 되잖아요.”

맞는 말이다. 70년대 초반의 일이다. 뜨내기 인생을 사는 쟁기 쥔 농사꾼에게 용접봉을 들려줬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 당시라면 어디 가서 배울 곳도 없었을 것이고, 생활 환경도 열악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현대가 자체적으로 처음부터 막 교육을 하는 겁니다. 정말 기초부터 시켰어요. 그런데 기능공들은 나이가 천차만별이고 교육 시키는 사람은 젊잖아요? 과장, 차장급들이 시켰으니? 그러다 보니 아무리 가르쳐도 손이 굳어버린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 해서 ‘등신같이 이것도 못하느냐’고 했다가 파업이 일어나기도 하고, 하하항. 그래도 배우겠다는 열성은 대단해서 마찰이 생겨도 금방 풀어져요.”

기술 가져오는 게 당연히 힘들었을 것 같네요.
“기술을 가져야 먹고 사는데 다른 곳에서 돈도 주고 기술 가르쳐 주는 데가 있나요? 그러니 열심히 배우는 거지요. 그런 속에서 다들 성장을 했는데, 그때 조선소 앞으로는 포장이 안 돼 가지고 시내에서부터 버스가 하루에 6회 왕복밖에 안 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산동네에 방을 얻은 친구湧?아침마다 마라톤이야, 늦어서. 하하항. 그러다가 조선팀이 정반 작업에 들어가면서부터 회사 주변에 간이주점, 간이식당, 여인숙, 이런 것들이 많이 생겨 그나마 조금 나아졌죠. 그때는 현대조선 식권이 현찰하고 같았어요. 식권 가져가면 밥도 주지만 담배, 술, 심지어 택시도 받아요. 식권 따먹기 화투도 많이 하고. 하하항. 배를 당장 만드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

현대중공업 식권 따먹기

교육은 어떤 걸 주로 시켰습니까?
“그때는 두 가지예요. 자질이 좀 우수하고 경력이 많은 사람은 해외 기능 연수도 보냈어요. 그 외는 전부 기초에서부터 실습을 겸해 정반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현재 플랜트 사업본부가 있는 자리쯤 되는데, 제일 먼저 지은 게 선박 공장이거든요? 그러니까 선박 공장 밑에다 까는 격자 정반이라고, 배 몸체를 만들려면 땅바닥에다 놓고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철판으로 격자를 깔고 그 위에서 만들어야 되는데, 그 정반 만드는 실습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아까운 걸 몰라요. 멀쩡한 철판이 얼마나 날아가는지 모르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회장님한테 혼났지, 하하항. ”

그래도 필요한 인력은 초기부터 채워서 시작을 한 셈이군요.
“원래 우리나라 조선업이라는 게 체계적으로 돼 있지 않았으니까. 처음에는 주로 신문 광고를 통해 모집을 했지요. 그러니까 전국에서 모여든 겁니다. 그런데 규모가 작더라도 조선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우대를 해 많이 뽑았구요, 나머지는 전부 뽑은 다음에 훈련을 시켜 보충했어요. 그래서 72년 말, 그때쯤 보니까 1500명쯤 됐다가 우리가 73년 3월인가? 블록(Block)을 만들기 시작했거든요? 블록은 배의 몸체를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선박 공장이 채 완성되기 전부터 블록을 만들었는데 그땐 기능인력이 대폭적으로 늘어났죠. 금방 1만 명이 훌쩍 넘었으니까요. ”

이런 환경에서 거대 선박을 건조하겠다고 덤벼들었으니 정주영 회장의 배짱이 아니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정 회장은 일을 해보겠다고 응모한 사람들은 거의 받아들이도록 지시했다면서 기능공들도 우수했지만 조선에 대한 기초교육만 받은 직원이라면 ‘한 놈도 버릴 게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그들을 모두 감싸며 끌고 갔다.

해외에 내보내 6개월 정도 교육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선소 건설이 가능했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지금껏 이런 소리 별로 하지 않았는데,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 젊은이만큼 두뇌가 우수하고 적응력이 빠른 친구들을 보지 못했어요. 거기다가 거의 비슷하게 골고루 우수해. 눈도장 찍는다는 말 들어봤어요? 그거 아무나 못하거든? 현장을 한번만 보면 설계도면 못지않게 그대로 뽑아내. 아주 우수해요. 그건 기본이 돼 있다는 소리 아니야? 몇 번 만났다고 했던 전갑원(전 현대건설 부사장)이, 그 친구를 데리고 내가 가와사키 조선소하고 미쓰비시 가야키 조선소를 갔어요. 구경만 하기로 하고 간 거야. 사진 한장 못 찍게 하니까. 정말 구경만 하고 나왔어. 근데 숙소에 돌아오더니 전갑원이, 이 친구가 뭘 하는지 알아요? 금방 도크 규모를 그려내고 바닥 콘크리트 밑으로 수압을 밀어 올리는 유공관식이 어쩌고 하면서 드라이 도크 스케치를 해내는 거예요. 하하항. 그래서 ‘도크 규모를 어떻게 알고 그린 거야?’ 했더니 그날 전갑원이가 도크 주위를 구경하는 척하면서 한 바퀴 돌았거든? 그때 발걸음으로 재면서 걸었다는 거야. 하하항. 그럴 정도예요. 그런데도 아주 정확해. 나중에 미쓰비시 애들이 와서 보고는 뒤로 나자빠져요. 정말이야. 그러니 전갑원이가 그때 과장인가 그랬는데 전갑원이만 그런 게 아니에요. 김형벽(전 현대중공업 회장)이니 이정상(전 현대중공업 전무)이니, 백충기(전 미포조선 사장)니, 그중에 김형벽이는 아주 뛰어난 눔이고, 하여간 스콧리스고에 갖다 풀어놓으니까 이눔들이 걸어 다니는 사진기고 걸어 다니는 컴퓨터야, 그러고 단숨에 배워. 하하항. ”

▶1970년대 중반의 현대중공업 조선 작업장.

“김형벽은 걸어다니는 사진기”

대단하군요.
“진직(진작)부터 우리 국민이 우수하다는 건 알았지만 절망이 없다는 건 그런 젊은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확신했어.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그네들이 무슨 고관대작들 아들이야? 특출하게 배우고 성장한 친구들이 아니잖아. 일반적인 보통 가정에서 자랐고 배운 사람들이니까 우리나라 평균 수준이라고 보면 되는데 조선소를 건설하지 않으면 니들도 죽을 각오하고 나도 같이 죽을 준비가 돼있다고 했더니 눈에서 불을 켜고 덤벼드는데, 그렇게 믿음을 줄 수가 없고 그렇게 이쁠 수가 없어요. 물론 교대로 60명씩 갔으니까 여러 엔지니어들이 스콧리스고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 일본 사카이데 조선소에도 기술연수를 보내고 그랬지만 그네들이 제 역할을 200%, 300% 다 해냈어. 가령 김형벽이 보고 ‘기자재 구입해 와. ’ 이 소리만 하면 단 한 가지도 버릴 거 없이 싹 해왔어요. 지가 언제 대형 조선소를 보기나 했어, 25만t이 넘는 선박을 만들어보기나 했어? 그런데도 어떻게 조사를 하고 어디서 알아냈는지 그때 황 머시기라고 삼성으로 간 눔이 있는데 그눔하고 같이 구라파 각국을 다니면서 조선소를 짓는 데 필요한 크레인, 프레스, 커팅머신, 이런 기자재들을 전부 계약해서 수입해 오는 거야. 크레인만 해도 종류가 한두 가지야? 귀신들이야. 그래서 내가 그걸 보고 우리나라는 절대 안 꺼진다, 그 생각을 한 거예요, 하하항. ”

여담입니다만 건설쟁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자제분 중에 누가 가장 회장님을 많이 닮았습니까?
“나도 여담인데, 밖에서는 누구라고 그래요?(웃으며, 이건 녹음하지 말라면서) 사실 자식은 아홉을 배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거든? 사람의 몸이 아홉 구멍이 있단 말이야. 이건 조물주의 뜻인 것 같거든? 근데 구멍이 모양도 틀리고 역할도 다 틀리잖아. 그러니 누가 가장 닮았다고 할 수 있어? 지 역할이 다 있는데. 하하항! (한참 웃다가)맹자가 그랬지? 천하의 우환 가운데 하지 말아야 될 세 가지만 지키면 대대손손 우환이 없다고 말이야. 그중에 하나가 애비가 자식들을 비교해 욕하지 않는 거래요. 누가 가장 닮았는가 얘기하면 나머지는 평생 나를 서운하게 생각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나도 모른다구 해야지. 하하항. ”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웃음). 모든 여건이 부족했지만 극복해 나가셨는데 시행착오도 많았을 것 아닙니까?
“그때 전국에 있는 엿장수하고 고물 장수들은 죄다 울산에 왔을 거야, 하하항. 기술자들이 6개월 훈련하고 돌아오는 건데, 그 사이에 공장을 짓고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지어져서 철판을 자르는 교육을 받고 그랬을 거 아니에요? 근데 이눔들이 철판을 자르는 게 미숙하니까 그걸 현장에서는 ‘기리빠시’라고 그러는데 일본 말이죠, 아주 쉬운 도면부터 앞에 놓고 자르는데도 멀쩡한 철판을 전부 조각조각 내서 기리빠시로 만들어 버리고 말이야. 그걸 또 혼날까봐 저 암벽 있는 쪽에다가 버리고. 그러니 고물장수, 엿장수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야. 엿이라도 바꿔 먹지, 엿 먹다 들키면 들통날까봐 그 짓도 못하고 말이지, 하하항. 참 순진했던 거지요. 그러니 돈도 수없이 처넣고 시행착오도 엄청 경험했지만 그렇게 조선소를 만들어 나간 거예요. ”

정 회장의 회고에는 부정적 시각이 없다. 지나간 일들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왕과 신하 사이에도 정은 끊을 수 있지만 무지를 탓하지는 않는다고 했듯이 그들을 비난했으면 몸을 던져 일할 사람들이 곁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홉 구멍과 아홉 자식

얘기를 들어 보니 건설 자재들도 착오가 많았다면서요.
“그건 부지기수예요. 국내에서 오륙십만t급 도크를 짓는다는 것부터가 건국 후 처음이니까 전부 모르는 것뿐이고 겁이 나잖아요. 그런데 의욕은 대단하니까 처음부터 최고로 만들어야 된다 해서 엉뚱한 짓을 많이 했지요. 지나고 보면 엉뚱한 짓이에요. 그런 일이 숱하게 많았어요. 일테면 자갈까지 외국에다 주문을 했어. 그래서 나중에 자갈을 갖고 왔는데 보니까 그나마 강도가 약해서 못 쓰는 거야. 그러니 그걸 전부 버리고 우리 한국 자갈을 썼어. 그렇게 서툴렀다는 거지요. ”

그런 여건에서도 기록적인 조선소 건설을 하셨으니까 해외 조선사들도 주목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배 엉덩이부터 들이밀어서 건조를 하고 아주 치밀하게 진도를 맞추고 그렇게 해나가는데 미쓰비시에서 말로는 격려를 해준다고 왔지만 조롱하려고 들여다보고는 나자빠진 거 아니에요. 그니깐 조선소 하나만 짓는데도 다른 나라 같으면 최소한 3년은 걸려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3년이 안 돼서 큰 조선소도 완공시켰고 조선소 완공과 동시에 배까지 건조해서 양도를 했으니까 말이지요. 이건 세계 조선사 어디에도 없지요. 그래서 세계 조선 역사에 많은 신기록을 낸 거예요, 현대 조선소가. 하하항.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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