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반과 숨바꼭질 썰렁해진 풍물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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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버틸거야. 갈 데도 없어."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친 7일 서울 청계 7~8가 삼일아파트 앞 황학동 벼룩시장의 파헤쳐진 보도블록 위에 노점상 나모(58.여)씨가 옷가지를 펼쳐놓고 있었다. 그러나 주말이면 5만여명이 찾던 벼룩시장은 썰렁했다. 지난달 30일 강제 철거당한 노점상들 가운데 1백여명이 이날 일요일 대목을 보려고 곳곳에 좌판을 펼쳤다. 하지만 단속반원들이 수시로 들이닥치고 물건을 가져올 수 없도록 차량 통행을 막아 제대로 장사를 할 수 없었다. 노점상 이모(50)씨는 "집에 쌀도 떨어져간다. 일요일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장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울먹였다.

전국의 다양한 중고 물품이 넘실대던 황학동 노점 벼룩시장이 을씨년스럽게 변했다.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공사를 위해 노점상들이 좌판을 폈던 보도를 갈아엎은 지 1주일. 일부 노점상들이 단속반과 숨바꼭질을 벌이며 끈질기게 버티고 있을 뿐이다. 발디딜 틈 없는 인파 속에서 흘러나오던 걸쭉한 입담과 넉넉한 인심, 어깨춤이 절로 났던 각설이 품바타령 등 옛 풍경은 온데간데 없었다.

미국인 스콧 퍼터(23)씨는 "서울의 대표적인 풍물거리라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 데 실망했다"고 말했다. 주말마다 골동품 수집을 위해 경기도 용인에서 온다는 김광강(63)씨는 "청계천 복원도 좋지만 너무 아쉽다"며 자리를 떴다.

황학동 입주 상인들도 울상이다.

20년간 카메라를 팔아온 성심카메라의 박모(64)사장은 "매출이 예전의 3분의 1도 안된다"며 "이젠 황학동도 끝났다"고 말했다.

문화서점 직원 이모(34)씨는 "똑같은 책을 노점상들이 싸게 파는 바람에 곤란한 적도 있었지만 거리 풍물이 사라진 황학동은 더 이상 살아남기 힘들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인들은 "서울시가 조성하는 송파구 문정지구로 가게를 옮기더라도 예전처럼 손님이 몰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서울시는 노점상들의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자 오는 13일부터 동대문운동장 경주로에서 노점상 주말 영업을 허용할 방침이다.

양영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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