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사랑의 매'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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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며칠 전 네다섯 살짜리 남매에게 쇠막대기를 휘두른 비정한 아버지가 구속됐다. 그가 휘두른 '정신봉'과 많은 부모.교사들이 주장하는 '사랑의 매'는 다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닮은 데가 많다. 매질이 교육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우기는 부모나 교사는 아직도 많다. 관습이라느니, 훈육이라느니 하면서….

어린이에 대한 폭력은 세계적 현상이다. 선.후진국 구분이 없다. 유엔 아동폭력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살해된 어린이는 5만3000명에 이른다. 18세 미만의 소녀 1억5000만 명과 소년 7300만 명이 성폭력을 당했다. 가정에서 매 맞는 어린이는 국가별로 80~98%에 이르며, 그중 30%는 도구로 폭행을 당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이란 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어린이에게 체벌하는 사람은 부모(45%), 교사(24%), 조부모와 형제자매(각각 10%), 친구(8%)의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사회조사연구소가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약 80%가 체벌을 경험했고, 특히 16%는 자주 체벌당한다는 것이다.

체벌은 자아존중감을 해치고, 공격성을 높이며, 학습효과를 떨어뜨린다. 폭력에 길든 어린이는 심각한 불안.우울.환각.능률저하.살인.자살.질병.성장장애.약물중독 등 문제를 일으킨다. 더구나 결혼하면 그 자신이 폭력적인 부모가 되는 식으로 폭력의 고통과 피해를 대물림하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체벌은 사랑과 교육의 이름으로 가정.학교.지역사회 어디서나 빈번하게 일어난다. 아동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가정과 학교가 오히려 폭력을 확대 재생산하는 셈이다.

'아동폭력은 예방될 수 있으며 폭력 없이도 잘 훈육할 수 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부터 아동폭력에 대한 연구를 의뢰받아 2003년부터 3년간 조사를 실시한 파울로 세르히오 파네이로 박사의 결론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첫째,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 비폭력의 중요성을 널리 공유해야 한다. 한국 등 세계 192개국이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모든 형태의 신체적.정신적 폭력과 학대 및 유기를 금지하고 있다. 이 협약은 교사 양성과 재교육 프로그램에 반드시 반영돼야 한다. 부모 교육이나 기업의 직원 교육에도 포함하는 등 이 협약의 정신을 좀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실천해야 한다.

둘째, 피해아동의 몸과 마음을 제때 치유하고 안전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인구 12만 명인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몽고메리카운티의 경우 114명의 사회복지사와 치료사가 피해아동 보호와 치료에 나선다. 그러나 2001년 설립한 한국의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는 300명이 채 안 되는 복지사가 전국의 피해아동을 돌보고 있다.

셋째, 아동폭력에 대한 철저한 모니터링이 중요하다. 요즘 툭하면 인터넷 폭력 동영상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청소년 사이의 폭력이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아동폭력 모니터링 과정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참여시키는 것도 바람직하다. 자신들의 문제 해결에 참여할 기회를 갖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 밖에 아동폭력을 예방하는 지방정부와 시민사회의 노력을 활성화하는 등 구체적 대책을 마련해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2009년까지 모든 나라가 아동폭력 금지법을 마련하고 신뢰할 만한 국가 데이터 수집 체계를 개발하라는 것이 유엔의 요구다. 한국도 어린이가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보호받으며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권리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제65차 유엔총회에 제출해야 한다. 그 보고서의 내용과 수준은 지금부터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아동폭력 문제를 파악하고 풀어가는지에 달렸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와 삶의 질을 결정짓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사랑의 매'는 부러뜨려도 좋다.

김경희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세계교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