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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의 몰입, 혼의 질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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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수진의 별명은 '강철 나비'다. 강철과 나비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가 한 몸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레리나 강수진은 강철의 팽팽한 긴장감을 담아 칼금을 그은 듯한 허리와 손동작, 그리고 상하좌우로 자유롭게 허공을 누비는 나비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몸놀림을 하나로 어울러낸다. 중력이 나비의 날갯짓을 꺾을 수 없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 제련된 강철이 쉬 부러지지 않듯 강수진은 유연하고 가벼우면서도 강하고 팽팽하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발이었다. 마치 고목의 옹이 진 것처럼 보이는 강수진의 발은 강철같이 팽팽한 긴장의 선과 하늘거리는 나비의 너울거림을 한 몸에 담아내기 위한 쉼 없는 훈련의 결과요, 혹독한 자기 채찍의 흔적이다. 실제로 강수진은 한 시즌에 수십, 수백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연습에 열중하고 몰두했다. 그것은 단지 몸의 훈련이 아니라 진정한 '혼의 몰입'이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진하고 깊은 감동 역시 바로 그 '혼의 몰입'을 통해 나온다.

그런 강수진이 이런 말을 했다. "더는 못한다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예술 인생은 거기서 끝이다!" 예술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 역시 더는 못한다고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며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봉달이' 이봉주 선수는 일 주일 전 2007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케냐의 키루이 선수를 40㎞ 지점에서 폭발적인 스퍼트로 제치고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펼치며 우승할 수 있었다.

봉달이 이봉주 선수는 자기보다 열 살이나 젊은 키루이 선수를 시간으론 25초, 거리론 약 137m 차이로 제치고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그것은 몸으로만 달린 것이 아니라 서른일곱 봉달이의 결코 멈춰설 수 없었던 '혼의 질주'였다. 그것을 통해 이봉주 선수는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이후 6년 만에 국제대회 정상에 다시 올라 '한물갔다'는 세간의 평가를 한 방에 날려버렸다. 아울러 이봉주 선수의 '혼의 질주'는 세파에 시달리며 어깨 처져 있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불끈 새 힘을 불어넣는 더 없는 자양강장제였다.

이봉주 선수의 대역전 레이스가 펼쳐지던 날 인터넷에는 봇물 터지듯 감동 어린 찬사가 쏟아졌다. 그중 이런 내용이 눈에 띄었다. "봉주형은 불혹을 앞두고도 자신의 꿈을 향해 이 악물고 뛰는데 난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에 좌절하고 있었다. 순간 너무 부끄러웠다. 나도 봉주형처럼 이 악물고 다시 뛰련다."

봉달이 이봉주 선수는 '혼의 질주'를 통해 우리의 인생 레이스가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단순하다. 소중한 것을 위해 뛰라는 것이고, 끝까지 죽을 힘을 다해 달리라는 것이다. 소중한 것은 의외로 소박하다. 이봉주의 경우엔 아무리 힘든 레이스에서도 떠올리면 힘이 됐던 아이들이고 아내이고 가족이었다. 그 소중한 것을 품고 뛰었기에 봉달이 이봉주 선수는 끝까지 달릴 수 있었고, 그 감동 어린 '혼의 질주'는 온 국민을 일깨우며 너도나도 다시 뛰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강수진이 '혼의 몰입'으로 발레의 일가를 이뤘다면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는 '혼의 질주'로 온 국민을 열광시켰다. 이제는 나와 너, 우리가 몰입하고 질주할 차례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