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6개월] 80여개대 인문대학장 '인문학 위기' 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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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이화여대 국제교육관. 전국 80여 개 대학교 인문대 학장들이 모여 '인문학의 위기'를 선언했다. 이들은 "인문학 등 기초학문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며 "인문학의 연구.교육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장은 컸다. 인문학뿐 아니라 기초학문을 살릴 방안 등 다양한 대책이 논의됐다. 교육인적자원부와 학술진흥재단은 올해 인문학 연구비를 200억원 늘렸다. 그러나 반년이 지난 올 3월, '인문대의 위기'는 여전했다. 19일 서울대에 따르면 2학년을 마친 인문대(어문.역사 계열) 학생 268명 중 44명(16.4%)이 다른 전공을 택해 과(科)를 옮겼다. 상당수 학생이 취업이나 고시를 의식해 경제학부.경영학과.법학부로 전공을 바꿨다. 인문대로 전입한 학생은 8명뿐이었다. 경영대.법대를 떠난 전과생은 한 명도 없었다.

◆비전 제시 실패=서울대 인문대 역사철학계열로 입학한 신모(21)씨는 올해 경제학부로 옮겼다. "원래 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자부심을 느끼기도 어려웠고, 졸업 후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위기 선언' 이후 서울대 인문대는 이공계 교수들을 초빙한 정기 특강을 마련하는 등 학문 간의 벽 허물기에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공계 교수들처럼 발 벗고 나서 기업과 학생들을 연결시켜 취업을 돕는 실질적 지원에는 소극적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학생들이 인문학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장래에 대한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려목(23.여) 인문대 학생회장은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교수님들은 대학원에 후학이 몇 명 생기는지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며 "(취업 등 장래를 걱정하는) 학생들과는 관심사가 다르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인문대 김창민(서어서문학) 교무부학장은 "취업이 안 돼 학생들이 떠나는 것은 우리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고 토로했다. 김 부학장은 "중문과 주도로 경제학과.인류학과 등의 중국 관련 과목을 묶어 '중국전문가 과정'을 개설하는 등의 연합전공제 도입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인문대 학생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대에 개설된 '정보문화학 연합전공'에는 인문사회계열 수강생이 60%를 차지하고 있다. 이 전공은 언론정보학과.공대.인문대 교수들이 모여 디지털 스토리텔링, 인터넷 게임, 사이버 문화 등을 가르친다. 이 전공을 선택했던 졸업생 대부분은 넥슨.NHN 등 인터넷 포털 업체나 정보통신 컨설팅 업체로 취업했다.

◆변화하는 인문대도=서강대의 변화 시도는 눈에 띈다. 이 대학 사학과는 올해 신입생들에게 ▶동서 고전▶현대 인문▶영어 토론 등 세 가지 세미나 중 하나를 선택해 수강토록 했다. 인문학을 사회에 응용해 보려는 시도다. 문학부 교수들은 올해 '영어구사 능력' 등 '서강 6과'강좌를 도입, 학생들이 졸업 후 사회에 나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했다. 서강대 문학부 정두희(사학) 학장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당장의 기술을 가르쳐 봐야 금방 뒤처지지만, 인문학적 지식을 잘 응용하면 사회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권근영.구민정 기자

◆전과(轉科)=서울대의 경우 2학년을 마친 학생들부터 신청할 수 있다. 단과대 정원의 20% 이내에서 전과가 가능하다. 영문.중문 등의 어문계열과 국사.동양사.철학.종교학 등의 역사철학 계열로 나뉘어 있는 서울대 인문대에선 올해 정원 268명 중 53명(19.8%)이 전과를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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