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중국의 새 리더 되려면 인문ㆍ사회과학을 전공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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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오가는 게 모두 소리가 나지 않는다(來去皆無聲)."

매년 봄 열리는 중국의 정치행사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ㆍ국회 격) 5차회의가 16일 막을 내렸다. 그러나 행사 취재를 위해 세계 각지에서 베이징(北京)으로 모여든 2300여 명 취재진의 실망은 컸던 모양이다. 차세대 지도자로 떠오르는 중국의 '정치샛별(政治新星)'을 취재하는 데 실패한 까닭이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뒤를 이을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리커창(李克强) 랴오닝(遼寧)성 당서기 등 5세대 지도자 후보군을 열심히 쫓았지만 허탕만 쳤다는 이야기다. 광둥(廣東)성 부성장으로 재직 시 재치있는 유머로 인기를 모았던 왕치산(王岐山) 베이징 시장도 이번만큼은 기자들과의 접촉을 회피했다. 홍콩의 동방일보(東方日報)는 정치샛별들이 소리ㆍ소문 없이 행사장인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을 드나들었다고 꼬집었다.


▶중국의 최고 입법기관인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5차 회의가 12일간의 일정 끝에 16일 폐막됐다. 이번 회의엔 2978명의 위원 중 2890명이 참석했다. AP=연합뉴스

왜 그랬을까. 오는 가을 열릴 제17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몸조심을 했기 때문이다. 7~8개월 후 열릴 당대회는 5년마다 열리는 지도부 개편의 당대회다. 중국 최고의 권력핵심인 정치국 상무위원을 비롯해 정치국 위원들의 면모가 일신된다. 이 같은 민감한 시기에 "말 많으면 반드시 실수한다(言多必失)"의 교훈을 되살려 몸 사리기에 나섰던 까닭이다. 중국의 정가 소식통들에 따르면 17차 당대회 준비를 위한 '준비영도소조'가 이미 닻을 올렸다. 후진타오 주석을 정점으로 현재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에선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 리창춘(李長春) 등이 준비영도소조에 참여하고 있다. 정치국 위원 중에서는 류윈산(劉云山) 당선전부장, 허궈창(賀國强) 당조직부장, 류옌둥(劉延東) 통일전선부장 등이 포함돼 있다. 준비작업은 두 가지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다. 원 총리가 당대회에서 발표할 보고문을 기초하는 작업을 지휘하고, 쩡 부주석이 인사 부문을 맡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번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진입이 점쳐지고 있는 5세대 지도자군의 학문적 배경이다. 이제까지 중국의 지도자 대부분은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였다. 현재의 정치국 상무위원 9명도 모두 대학에서 이과(理科)를 전공했다. 이 중 후진타오 주석 등 4명은 중국 최고의 이과대학인 칭화(淸華)대 출신이다. 이 때문에 중국 정가에선 한때 "지금은 대청시대(大淸時代)"라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다. 중국 지도부에 테크노크라트가 많은 것은 1919년 5ㆍ4 운동 이래 '과학'과 '민주'를 강조해온 시대적 흐름을 배경으로 한다. 중국이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는 수모를 겪게 된 게 기술문명의 낙후에 있었다고 보고, 많은 열혈 청년이 '기술보국(技術報國)'의 기치 아래 이과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이제 '인문ㆍ사회과학 전공자' 중에서 지도자를 뽑으려 하고 있다. 국가 건설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판단 아래 앞으론 사회의 각종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 있도록, 법학이나 경제학 전공자 가운데서 지도자를 찾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차세대 지도자군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인물이 바로 올해 52세의 리커창이다. 후진타오 주석의 권력배경인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출신인 리커창은 베이징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 리커창과 권력서열 1위를 다툴 것으로 보이는 리위안차오(李源潮) 장쑤(江蘇)성 당서기는 푸단(復旦)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지만, 대학원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했고, 박사학위는 법학으로 받았다. 그런가 하면 차기 총리감이란 이야기를 듣는 보시라이(薄熙來)는 베이징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신문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뿐인가. 중국 정가의 다크호스로 불리는 시진핑(習近平) 저장(浙江)성 당서기는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졸업했지만, 박사학위는 법학으로 받은 인물이다. 한편 왕치산 시장은 시베이(西北)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으나, 오랜 금융 관련 실무업무를 바탕으로 이젠 칭화대경제관리학원과 중국금융학원의 겸직교수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류윈산 선전부장과 한정(韓正) 상하이 시장은 모두 사범학교 출신이다. 테크노크라트가 아니면 출세를 꿈도 꾸지 못했던 4세대 지도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중국은 2012년 시작될 5세대 지도부를 이 같은 인문ㆍ사회과학 전공자들로 채울 계획이다.


한편 이 같은 중국의 지도자 육성 계획의 모델이 된 나라는 미국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은 이제까지 42명의 대통령 중 무려 26명이 변호사 출신이었다고 한다. 1865년 남북전쟁 이래 미국이 커다란 내분을 겪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가 지도자가 사회갈등을 잘 조율할 줄 아는 법학 전공자였다는 점에 중국은 착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17차 당대회에선 이들 인문ㆍ사회과학 전공자가 대거 중앙지도부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 중국에선 테크노크라트의 시대가 지고, 새로운 인문학 지도자들이 정치 전면에 나서 인치(人治)가 아닌 법치(法治)의 시대를 열어갈 것으로 보인다.

유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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